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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보다 쓴 맛

Relay Essay 제2256번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인턴 시절이었다. 공휴일에 당직을 서다가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워 혼자 외래를 지키고 있었는데 웬 낯선 사람이 외래로 들어왔다. 공휴일이라 올 사람이 없었기에 어리둥절하던 와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갑자기 임시공휴일이 지정되는 바람에 약속이 변경된 줄 모르고 찾아온 환자였다.

환자 약속관리는 보통 데스크의 보조 인력들이 전담하던 일이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겠다고 여기저기 전화를 했지만 별 수 없었고, 그 날 진료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전하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환자는 반말로 짜증 섞인 불만을 나에게 쏟아내었다. 적당히 죄송하다고 하고 좋게 마무리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내 잘못이 아님에도 당직을 서고 있다는 죄로 욕을 먹고 있어야 하는 게 억울해서 욱 하는 마음에 한마디라도 한다는 게 “왜 자꾸 반말로 그러세요”라고 말을 끊었다. 순간 그 사람은 겸연쩍어 하며 존댓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갔지만, 그게 마무리 된 것이 아니라는 걸 다음 날에 알 수 있었다.

다음날은 종일 수술방에서 수술 어시스트를 하고 있었는데 오후 수술이 끝날 때 쯤 수술방으로 전화가 왔다. 어제의 그 환자가 찾아와 내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못가겠다고 6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며 데스크의 치과위생사가 난처해하며 수술이 끝나는 대로 외래로 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려가서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하지? 근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하지? 반말 하지 말라고 해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혹시 따귀라도 맞는 건 아닐까?’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며 외래로 돌아가는 그 때 그 길이 엄청 낯설고도 무서웠다.

어제의 그 환자와 상담실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서, 그 순간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은 부모님의 가정교육까지 운운하며 ‘어른이 반말을 좀 했기로서니, 그것 가지고 따지고 드냐’는 내용으로 한 시간 가량 소리를 질렀다.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그 날 저녁 교수님께서 힘내라고 사주신 소주맛보다 더 진한 사회생활의 쓴맛을 보았다.

그때보다 병원생활의 경험이 더 쌓인 이제는 환자가 화가 나면 충분히 반말이나 욕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병원의 실수로 환자에게 피해가 간 상황에서 나는 무조건 죄송하다고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갑자기 화내는 환자 앞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직은 어렵고, 더 많은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곧 졸업하고 나가게 될 4학년 후배들 중에 수련을 지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소문을 들어서 안타깝다. 나는 단지 전공의 유니폼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내가 좋아하는 과목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단순한 이유로 수련을 선택했지만, 이곳에서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쌓이는 업무에 지치기도 하지만, 다양한 환자들, 학생들, 다른 과 전공의, 우리 의국원, 교수님들과 하루 하루 쌓여 가는 시간들은 지나고 나니 다 좋은 추억이 되고 있다.

환자를 보는 술기 이상으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대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라 다 소중한 시간들이라 생각한다.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여기며 힘내서 오늘 진료를 시작해야 겠다.


이주영 부산대치과병원 보존과 전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