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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캣, 동네 고양이

스펙트럼

‘고양이 거리’로 유명한 일본의 야나카 긴자, 안타깝게도 나는 그 곳에서 단 한 마리의 고양이만을 만날 수 있었다. 블로그에서 본 것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여주인의 발 밑에서 배를 뒤집고 노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그 마을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고양이 모양 악세서리를 파는 상점이나 고양이 인형을 세워둔 커피숍 정도였다. 그래도 운이 좋아 그 혼잡한 골목에서 넉살 좋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사진을 찍던 나에게 현지 방송국의 카메라맨과 기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일본 기자와 나는 둘 다 영어가 엉터리라 대화가 통하지 않았는데, 그 기자의 입에서 나온 이 문장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는 이런 고양이를 커뮤니티 캣(community cat)이라고 불러요.’

이 ‘커뮤니티 캣’이라는 말은 인터넷에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길고양이나 야생고양이를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직역을 하자면,  ‘지역 고양이’,  ‘마을 고양이’ 정도 될 것 같다.  어릴 적에 시골 우리 집에 드나들던 뚱뚱한 노란 고양이가 있었다. 녀석이 굼불을 때던 할머니 엉덩이에 머리를 부비면, 할머니는 부엌 제일 명당자리인 부뚜막을 공짜로 내어주셨다. 녀석은 할머니 부엌에서 잠을 잤지만 밥은 앞집에서 얻어먹었다.
앞집에는 큰 진돗개를 키웠으니 아마 남는 고깃덩어리라도 녀석에게 나눠주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녀석을 ‘살찐이’라고 불렀는데 앞집에서는 뭐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다 얼어 죽어 가는 것을 살려 놨더니 남의 집 쥐만 잡아먹는다고 녀석을 ‘웃기는 놈’이라고 부르기도 하셨다.
아마 ‘커뮤니티 캣’이란 이 살찐이 같은 고양이를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여기 저기 편하게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잠 자리를 빌리고 기분 좋으면 골목 한 가운데서 배를 뒤집기도 하는 동네 고양이 말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젊은 층의 유동 인구가 많고 인테리어 공사용 전동 공구의 소음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중심지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의 간판이 바뀌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몸살을 앓는 곳. 나 자신도 언제 이사를 갈 지 몰라 ‘우리 동네’라고 부르기 어색한 곳. 이런 ‘우리 동네’에도 커뮤니티 캣이 있다. 화물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낮에는 모른다. 하지만 밤이 되면 작은 상점 문 앞에, 혹은 차량이 빠진 주차장에 사료 그릇이 놓이고 어디선가에서 고양이들이 하나 둘 몰려든다. 한껏 차려 입은 행인들이 사라진 어두운 골목에는 츄리닝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나와 긴 깃털이나 리본을 들고 고양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근처 편의점의 야간 아르바이트생, 술집의 아르바이트생들이 쉬는 시간에 잠깐 나와 고양이 물그릇에 물을 채워 주기도 한다. 낯선 손길을 두려워하는 고양이들은 슬그머니 물러서지만, 넉살 좋은 녀석들은 이내 머리를 부벼댄다. 퇴근 후 늦은 시간에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일은 요즘 나의 큰 즐거움이다. 운이 좋으면 고양이가 사료 그릇에 머리를 박고 뺨을 오도독 실룩이는 모습을 볼 수도 있으니까. 꼬리를 크게 부풀리고 송곳니를 드러내는 모습도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커뮤니티 캣’을 보며 내가 살아가는 이 곳이 ‘커뮤니티’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면 좀 아이러니한 이야기일까. 우리 동네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이 번화한 거리에서 익숙하게 살아가는 연약한,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들. 그리고 이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밤이 되면 조용히 사료 그릇을 꺼내 놓고 새벽이 오면 이웃에게 부담이 될까 치우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다. 낮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만 눈에 띄지만, 밤에는 이웃들의 키에 맞춰 조용히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긴 리본으로 고양이와 놀아주는 학생 뒤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열심히 리본을 쫓던 동네 고양이는 내 손에 쥐어진 소시지를 보더니 금세 내 쪽으로 달려 왔다. 우리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분명 ‘웃기는 놈’이라고 하셨을 거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유란 원장
모두애(愛)치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