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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피니, 국경 없는 치과의사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17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애국자인 루이 파스퇴르(1822-1895)가 남긴 명언의 본 뜻은 과학자로서 뛰어난 발견의 영광을 국가에 바친다는 함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치과의사에게 국경은 있는가? 언어적 장벽만 해결된다면 치과의사에게 국경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치과의사에게 진정 세상은 넓고 일할 곳은 많은가? 치과의사 과잉 배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에 대한 시급하고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치과의사 공급과잉 문제는 1987년 네델란드의 대책을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네델란드는 1987년 5개의 치과대학중에서 3개를 전격적으로 폐교하였다. 그 이유는 네델란드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본국이 아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구가 1700여만 명인 네델란드에 3개의 치과대학이 있다. 정원을 줄이는데 개교한지 백년이 넘은 위트레흐트(Utrecht) 치과대학도 열외가 아니었기에 충격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줄어든 정원만큼 약학대학에 보상을 해 주었다는 말은 미소를 짓게 하는 반전이었다. 치과의사 공급과잉, 이렇게 쉬울 수가!
  
이번 그림 속의 주인공은 바르톨로뮤 루스피니(Bartholomew Ruspini, 1728-1813)다(그림1).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모데나(Modena)에서 외과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치의학을 공부한 후 1766년부터 30여 년간 영국 런던에서 치과를 개원하였다. 루스피니는 치과의사로 유명인사가 되어 영국 왕세자(나중에 조지 4세가 됨)의 치과주치의까지 역임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와 영국을 오고 간 루스피니는 글자 그대로 국경이 없는 치과의사였다.

루스피니는 필자의 두 번째 칼럼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다(치의신보 제2488호)’에서 소개되었던 치과의사였다. 토머스 롤런드슨(Thomas Rowlandson, 1756-1827)은 ‘Transplantati- on of teeth(1787년)’에서 불우한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서 건강한 치아를 돈을 주고 사서 귀족 부인에게 이식술을 하는 루스피니를 풍자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다이튼(Robert Dighton, 1752-1814)의 작품 ‘The London Dentist(1784)’에서 루스피니는 전형적인 로코코(Rococo)풍의 그림 속에서 세련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그림1).

이번 그림1은 치의신보 제2530호에 소개된 로버트 다이튼의 ‘The Town Tooth Drawer’와 구성요소가 비슷하여 비교해서 보면 더 재미있다. 이번 그림의 장소도 화려하고 천장이 높고 웅장하다. 창문에 비치는 건물은 근위병이 서있는 St. James Palace이다. 이 무렵 세인트 제임스 왕궁이 보이는 팰맬(Pall Mall) 거리에서 개원을 하고 있었던 유일한 치과의사가 바로 루스피니였다. 이전 그림과의 다른 점은 소파에 타올 대신에 현악기와 악보가 놓여있다. 아마도 취미로 음악을 즐기는 루스피니의 악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는 치과의사의 행복은 치과에서 환자가 없을 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루스피니가 치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없었지만 나름 의미있는 발자취가 남겨져 있다. 1768년 출판된 저서 ‘A Treatise on the Teeth, Their Structure and various Diseases’를 통하여 어린이 충치의 조기 치료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결국 영국국민들은 광범위한 치아 상실로 인하여 불필요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루스피니는 그 당시 사용되던 구강 미러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미러와 거의 흡사할 정도로 개선시켰다. 루스피니는 ivory denture 보관을 위한 도자기 용기를 제작하였고,. 그 용기는 Ruspini display holder라고 불리운다.


1808년 포셀린으로 단일치를 최초로 개발한 이탈리아 치과의사 Guiseppangelo Fonzi(1768-1840)로부터 사용 방법을 전수 받은 루스피니는 영국 부유층에게 유명한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는 치과의사로서 얻은 직업적 성공을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1788년 런던에 있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단체의 도움을 받아 루스피니는 상당 부분의 재산을 들여 고아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개교한 날의 장면이 화가 Francesco Bartolozzi(1728-1813)의 작품으로 남아있다(그림2). 그림에서 루스피니는 어린 소녀들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있고, 그림의 우측에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은 Prince of Wales(영국 왕세자, 첫째)와 Duke of York(요크 공작, 둘째)이다. 1798년에는 고아 소년들을 위한 학교도 개교하였고 현재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RMTGB(Royal Masonic Trust for Girls and Boys)이다. 

직업적 훌륭함과 역경과 가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베푼 관용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인 슈발리에(Chevalier)가 1789년 루스피니에게 수여되었다. 루스피니의 인생항로는 이탈리아를 출발해서 프랑스를 경유하여 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그리고 그가 운전했던 배에는 수많은 고아 소녀와 소년들이 승선해 있었다. 루스피니의 인생이 필자로 하여금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아시와 아프리카에서 국경 없는 치과의사로 봉사활동에 참여하시는 대한민국 치과의사 선생님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권 훈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미래아동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2540g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