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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타이메스트라’ 주체적 여성인가? 복수의 악령인가?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기원전 458년 아이스퀼로스가 대 디오뉘시아 축제 무대에 올린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은 그리스 비극의 유일한 삼부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삼부작은,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한 오레스테스가 아테네 여신이 창설한 배심원 재판정에서 무죄 방면되는 과정을 극화했습니다. 아테네 여신의 섭리로 가부장제도가 다시 확립되고 복수의 정의가 문명적인 정의로 진화하는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국가 아테나이가 탄생합니다.
  

이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아가멤논>인데, 이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클뤼타이메스트라입니다.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 튄다레오스와 레다의 딸이고, 아르고스 왕 아가멤논과 결혼하여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크뤼소테미스, 오레스테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읽어보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불행한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본래 유부녀였지만, 아가멤논이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살해하고 강제로 그녀와 결혼했다고 합니다(1149-52). 이 사건에 이미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 처음으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 왕이 트로이아 원정을 떠난 후 남겨진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마음씨 착한 여인으로 아이기스토스의 구애를 수치스러워하며 거절합니다. 그러나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운명에 복종해 아이기스토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남편의 살해를 공모합니다. 트로이아를 정복한 후 아가멤논 왕이 귀향하자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 왕과 그의 전우들을 살해합니다.

비극 <아가멤논>에서는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남편 아가멤논을 직접 살해하는 인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가 아가멤논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가 직접 세 가지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아가멤논이 트로이아 원정을 떠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가멤논이 전리품 캇산드라 공주를 첩으로 집에 데려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과거에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죠. 이 세 가지 이유들 가운데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보입니다.

아가멤논이 난처한 딜레마 상황에서 딸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지만,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가정을 파괴한 남편에 분노하여 그를 살해해 복수한 것입니다. 상처받은 모성의 분노가 이렇게 무시무시하네요. 물론 클뤼타이메스트의 복수에는 다른 동기들도 숨어 있겠죠. 그녀는 아르고스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 아가멤논의 엄청난 재산을 누리며 애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겁니다.  

아가멤논과 캇산드라를 도끼로 살해하고 나서, 그물과도 같은 옷에 휘감겨 다정하게 누워 있는 남녀의 시체 앞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복수의 희열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는 헐떡거리며 제 목숨을 내보냈고/ 상처에선 핏줄기를 날카롭게 내뿜으며/ 피이슬의 거뭇한 소나기로 날 때렸소./ 이삭이 나올 때 제우스가 내려주신 빗물에 흠뻑 젖어 기뻐하는 곡식마냥 꼭 그렇게 기뻤소이다.”(1388-92) 이처럼 아가멤논이 뿌리는 피는 곡식을 영글게 하는 축복 가득한 빗물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목마른 곡식이 풍성한 빗물에 흠뻑 젖어 기뻐하듯이 복수에 목마른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아가멤논의 핏방울을 흠뻑 맞으며 거의 성도착에 가까운 희열을 드러냅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복수의 정의에 따라서, 가정을 파괴한 남편에게 복수하는 주체적 여성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복수의 희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주체적 여성을 넘어서 복수의 악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참고문헌: 김기영 옮김,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을유문화사, 2015.)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기영
서양고전학자,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 및 서울대 객원연구원.
저서로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세계>, <신화에서 비극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신화의 숲에서 리더의 길을 묻다>(공저) 등, 역서로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왕 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