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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연못

오지연의 Dental In-n-Out

지난 달 푸미폰 전 태국 국왕의 장례식 직후에 파타야에 갔더니, 마치 집안 친척이나 할아버지 얘기인 듯 장례식 다녀온 얘기를 하는 태국인이 많았다. 방콕까지 직접 다녀온 사람도 있고 파타야 곳곳 영정을 모셔놓은 분향소에 다녀온 사람도 있었는데, 전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열기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푸미폰 왕은 1946년 즉위한 이래 70여 년 간 재위하며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산간 오지의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심던 아편을 커피로 바꿔 재배하도록 독려하고 그 판로도 마련하여 지금도 타이항공에서는 승객들에게 그 커피를 제공한다고 하며, 오염된 저수지의 정화 정수 장치를 개발해 새우와 물고기 등을 양식하게 하여 식량 자급자족을 하도록 도왔고, 가뭄을 해결하고자 왕 스스로가 인공강우 전문가가 되었을 정도로 농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데 평생을 바쳤다.

오랜 재위기간 중 로얄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개발도상국의 단계적 발전 계획들 수천 개를 펼치는 동안 스무 번에 가까운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왕권은 점점 강화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서로 첨예하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푸미폰 왕에게만은 일치된 사랑과 존경을 보내는 이 진기한 현상은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일년에 200일 이상을 (카메라와 지도를 들고) 직접 차를 운전하여 수많은 소수 민족과 고산족 마을을 포함한 전국의 국민들 곁을 찾아가 부락 지도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주민들과 함께 식사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숙한 모습의 왕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스위스 유학 시절, 의문의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할 정도로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고, 경호상의 어려움이 상당했을 텐데도 왕은 내내 꿋꿋하게 국토순례를 계속했고 한 때는 직접 운전해 시골길을 달리는 국왕의 사진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진 등 매체를 통해서 어떤 인물을 접할 경우, 그의 훌륭한 견해에 ‘總論 贊成’의 심정으로 많은 부분 공감을 한다 해도 어쩐지 동경이나 선망 혹은 질투의 대상으로 인식될 따름이고 내 편이라는 동지애까지 생겨나기란 쉽지 않다.

때때로 혼잣말로 속마음을 토로해 볼 수야 있겠지만 사진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결코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바꿔 건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모호하고 연약한 연대감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직접 대면하여 반짝이는 눈동자가 얘기 나누는 내내 서로의 눈을 직접 바라보고, 미묘한 억양을 느끼고, 표정으로 리액션을 주고받고, 악수로 서로의 온기와 에너지를 나누고 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한 팀이라는 실감이 찾아 올 때가 많은데, 뭐 저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비록 “어렵겠다.”고 말하면서도 따스한 눈빛으로 “그렇지만 조금만 기다려 준다면!”이라고 유보의 신호를 보내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시길.”이란 의례적 인사에 마치 화음이 얹히듯 “직접 와서 내 얘길 들어주다니, 이번엔 한번 해 볼 만하군요.”생각하며 한결 밝아지는 마음의 소리가 겹쳐 울리는 것을 놓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한 팀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에게로 다가가 참견하기로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면 뜰 안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해 저물 무렵이면 먼데서도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그 여자네 집을 지날 때마다, 그 여자와 그 여자 오빠가 두런두런 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옷자락들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 마당으로 들어가서 자신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어진다는 김용택의 애절한 고백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지. 그런 날, 가을 녘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그 집, 햇살마저 노랗게 내려앉은 마당 한 쪽 키 큰 은행나무 언저리엔 아마도 샛노란 은행잎이 가득할 것이다. 모여 앉은 우리들처럼 서로 어깨를 맞대고 소복소복 쌓여 깊고도 너른 축복의 황금빛 연못을 이룬 은행잎들이.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