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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을 꽃 피운 필로칼로스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삶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고유한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필로’(philo), 즉 ‘사랑, 친구’라는 말이 붙은 말로 사람들의 가치관을 표현하였다. ‘돈과 부(富)를 사랑하는 사람’(philochrēmatos)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philarchos)도 있었다.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philotimos), ‘도시 공동체를 사랑하는 애국자’(philopolis),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philomousos)도 있었다. 물론 ‘술 좋아하기’(philoposia)도 빼놓을 수 없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철학자)와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philomatēs)에 대한 표현도 문화적 황금기를 이룬 그리스 고전기(기원전 5세기)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삶을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가장 행복한 삶을 살며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의 기록이 주목할 만하다. 보잘 것 없던 그리스에 거대 제국 페르시아가 쳐들어 왔을 때,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에 감격하며 그것을 기록한 것이 헤로도토스의 『역사』다. 그는 그리스의 위대한 승리의 비결을 자유에서 찾았다. 자유롭게 일어선 그리스인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페르시아 인들을 꺾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그리스의 일곱 현인(賢人)의 하나인 솔론의 이야기다. 솔론은 아테네를 떠나 여행을 하다가 거대한 왕국을 건설한 사르디에스의 크로이소스 왕을 찾아갔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자신의 엄청난 보고(寶庫)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자는 누구요?” 내심 자신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솔론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아테네의 텔로스입니다. 그의 국가는 번성했고 자식은 아름답고(kalos) 훌륭했죠. 풍요와 번성을 누리던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적들을 격퇴하고 가장 아름답게(kallista) 전사했습니다.” 이처럼 행복한 삶이란 ‘모든 아름다운 것들(kala)을 다 누리다가 가장 아름답게(kallista) 죽는 것’이라는 말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물리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으로 떠올랐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번영을 바탕으로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가 꽃 피어났다. 문학과 예술의 역량은 심오하고 장엄한 비극과 고품격 풍자의 희극에 응집되었고, 그리스 전역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소피스트와 철학자들이 아테네로 몰려와 지성을 뽐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도 이 문화적 황금기의 자랑이었다. 이 시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다. 그는 스파르타와의 군사적 충돌에서 타격을 입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아테네 청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고통스러운 훈련을 겪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도시는 경탄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philokalos) 사치스럽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지만(philosophos) 유약하지 않습니다.” 아테네가 제국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힘, 그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에서 나온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지혜로운 자는 위기에서도 현명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용기로 삶을 빛낼 것이며, 결코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 죽음을 아름답게 장식할 투지에 불끈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쯤 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8-348년)는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름다움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면서 살 때이다.”(『향연』 211d)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 때 비로소 삶은 훌륭하고 가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필로칼로스(philokalos)라고 했다.(『파이드로스』 248d) 이들이 아테네의 정치적 전성기와 문화적 황금기를 이끌었던 것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 헌
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정암학당 연구원.
서양고전학(그리스) 전공.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리스로마신화’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 
역서 ‘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이펙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