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아름다움의 철학자, 플라톤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플라톤의 『크라티아스』라는 작품에는 주인공 크라티아스가 아테네의 선조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테네 도시 중심부에는 시민의 수호자이며 지도자인 군인들이 검소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아크로폴리스 바깥쪽 비탈 아래에는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공급하는 수공업자들과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부들이 있었단다. 이들에 관해 크라티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땅과 그리스를 정의롭게 통치하였고, 신체의 아름다움에서나 영혼의 모든 훌륭함(또는 덕)의 측면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체에 두루 알려져, 당시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들이었다.”(112e) 한편 아테네 바깥 지역에는 농부들에 의해 잘 가꾸어진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농부들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philokalos) 좋은 천성을 가진 사람들로서 최상의 기름진 땅과 풍부한 물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상에서는 최적의 계절과 기후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일세.”(111e)

이 작품에 그려진 아테네는 중국의 요순시대에 버금갈만한 이상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는데, 유독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가 눈에 띤다. 신체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탁월성, 훌륭함, 덕, 즉 아레테와 나란히 가치 판단의 중요한 기준처럼 제시되며, 그곳을 일구는 사람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들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띤다. 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는 지도자들의 집과 업무시설의 장식에 관한 서술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그것들을 금과 은으로는 장식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런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사스러운 것과 볼품 없는 것의 중간 정도의 것을 장식의 주안점으로 삼았다.”(112c) 이런 사람들만이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국가인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이루어 내리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 나라는 화려함이 아니라 정의로움과 조화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나라다. 

플라톤의 다른 작품인 『파이드로스』에서는 영혼의 깨끗함에 따라 인간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인 필로칼로스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의 하나로 나타난다. “가장 많은 것들을 본 영혼은 장차 지혜를 사랑하거나(philosophos) 아름다움을 사랑하거나(philokalos), 시가를 따르거나(mousikos) 사랑을 따르게 될(erōtikos) 사람의 싹에 심긴다.”(248d-e) 여기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다름 아닌 철학자다. 아름다움과 시가, 사랑에 삶의 중요한 가치를 건 사람들은 이렇게 철학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여덟 개의 등급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 등급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법에 충실하며 전쟁을 잘하고 지휘에 능한 왕이며, 셋째는 정치가와 경제전문가, 경영인, 넷째는 사업가, 체육가, 의사, 다섯째는 예언가, 사제 등 종교인, 여섯째는 작가, 일곱째는 목수, 석공, 농부, 여덟째는 소피스트와 민중선동가, 아홉째는 독재적인 폭정을 일삼는 참주이다.

둘째에서 아홉째까지는 구체적인 직업이 언급되고 있는 반면, 첫 번째는 구체적인 직업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글이 실리는 ‘치의신보’가 의사들을 독자로 하는데, 의사를 넷째 등급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플라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일면 민망한 점이 있는데, 특히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논리 전개를 적극 해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플라톤이 직업에 따라 등급을 나눈 것은 각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을 줄 수 있느냐와 같은 다소 산술적인 차등 이상의 의미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각자가 일과 사람에 대해 갖는 태도며 ‘삶의 방식’(modus vivendi)이다. 플라톤의 논의에는 여덟, 아홉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폄하하는 태도가 깔려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 첫 번째 등급의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직업에 종사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그가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의 태도로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음악과 시의 정신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장 고귀한 영혼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가장 고결하고 품격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플라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지혜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향연』에서 플라톤은 이렇게 썼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것이며, 사랑(에로스)도 아름다움에 관련된 에로스입니다.”(204b)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 헌
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정암학당 연구원.
서양고전학(그리스) 전공.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리스로마신화’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 
역서 ‘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이펙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