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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을 위한 변명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히는 이는 단연 헬레네다. 스파르타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실은 제우스의 딸이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여인 레다에게 반하여 백조로 변신하였고, 그녀가 거니는 호숫가로 날아들었다. 그 이후 레다는 두 개의 알을 낳았다. 헬레네는 그 알을 깨고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자 세상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매혹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아테네 건국 영웅 테세우스였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는 그리스의 영웅호걸들이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며 스파르타로 모여들었고, 그녀가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뒤에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그녀를 납치해가자 그녀를 되찾는 전쟁에 모두 참여할 정도였다. 트로이아인들은 대규모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헬레네를 지키기 위해 10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감수하였다.

트로이아 원로들의 말이다. “비난할 게 없소. 트로이아인들과 멋진 경갑을 찬 아카이아 인들이/ 저와 같은 여인을 두고 기나긴 시간 동안 고통을 겪었다 해도 말이오./ 놀랍잖소, 그녀는 눈으로 보기에도 죽음을 모르는 여신을 꼭 닮았소이다.”(3.156-8)

그녀는 아름다움의 화신이며, 그녀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었단다. 그런 점에서 그녀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그리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은 모두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며 달려드는 ‘필로칼로스’(=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 최고의 소피스트로 꼽히는 고르기아스는 그녀를 위한 찬가를 썼다. 그녀가 잘못한 거라고 비방하며 책망하는 자들에 맞서 그녀가 아무 죄가 없음을 변론함으로써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것이다. 헬레네를 위한 변명의 첫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훌륭한 용기, 몸의 아름다움, 영혼의 지혜, 행동의 탁월함, 말의 진실, 이 모두가 도시를 빛내는 장식(cosmos)입니다.”

그의 제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이소크라테스도 그녀를 위한 찬사를 썼다. 찬사의 밑바탕에는 그녀가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변명의 논조가 깔려 있다. 헬레네를 구하려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마저도 지탄할 것이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대상을 보는 즉시 호감을 갖게 되며, 그들에 대해서는 마치 신들에게 그렇게 하듯이 정성껏 존중을 표하는 것을 금할 것이 없습니다.”(<헬레네 찬가> 56) 이런 태도는, 예컨대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할 때 ‘여신’이라는 칭호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현재 우리의 어법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그녀의 인품, 실력, 배경을 따지기 전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먼저 매혹되고 압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후예, 또는 동료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이들에게 종이 되는 것을 더 즐거워하며, 우리에게 복종하며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아무리 많은 명령을 내리더라도 아름다운 이들에게 더 고마워합니다. 다른 여타의 힘에 눌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아첨꾼이라고 부르지만, 아름다움을 떠받들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필로칼로스라고 생각하며 존중하지요.”(57)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필로칼로스, 이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삶의 최고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숭고하며 가장 명예로우며 가장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와 지혜와 정의를 갖지 않은 사람도 아름다움 하나로 존중을 받을 수 있으며, 아름다움이 결여된 사람은 다른 많은 것들을 갖추었어도 사랑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아름다움이 삶의 방식 가운데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54) 아름다움과 헬레네를 향한 그의 찬가는 아름다움 자체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통하는 신념이며, 유미주의의 뿌리가 되는 발상이다. 그것이 비록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아름다움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렸다. 이소크라테스는 그 방향을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로까지 돌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을 궁극적으로 지킨 것이다. 헬레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녀가 그리스인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해주었고 용감하게 적을 향해 돌진하게 함으로써 죽음조차도 찬란하고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변호하고 찬양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 헌
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정암학당 연구원.
서양고전학(그리스) 전공.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리스로마신화’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 
역서 ‘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이펙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