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Hope Against Hope

오지연의 Dental In-n-Out

12월은 의외로 결혼 시즌인가보다. 지난 주말에도 매서운 강추위에 두 곳의 결혼식에 다녀와서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무엇인가 매듭을 짓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겠거니 짐작해본다. 그러나 2018년이 온다고 해서 지구가 새 것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또 겪어 보신 분들은 모두 알고 계시듯 결혼이란 매듭이라기 보단 차라리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요컨대 꼭 이럴 것 까진 없지 않나 싶지만 남 일일 땐 다 알 것 같아도 막상 내게 닥치면 생각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내로남불’이라 했던가.

조카의 결혼선물로 앞치마 7개를 주었다는 글이 있었다. 미대를 나와 오래 동안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여성이었는데, 물방울무늬와 꽃무늬, 줄무늬 등 앞치마 디자인으로 쓰이는 대부분을 망라(?)하여 일주일간 돌아가면서 사용하라며 주었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적 관점에서라면 살짝 논란을 부를 선물이고 글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과 가정을 힘겹게 양립시키며 살아 온 스스로의 所懷를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갈 조카딸에게 조용조용 들려주는 글이어서 꽤 뭉클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직장과 살림과 육아 중 어느 것을 외면 할 수도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삶의 부조리이다.

‘異邦人’에서 뫼르소의 엄마가 ‘양로원에 있기도 싫지만 나올 수도 없었던’ 고통이나,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며 이렇게 내리쬐는 해살 아래서는 천천히 걷다가는 일사병에 걸릴 것이고 빨리 걷다가는 탈수될 거라고 절망하던 바로 그 부조리 말이다. ‘삶의 명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과 조용하고도 무자비하게 불합리함을 자행하는 우주사이의 대결’이라고 쓰면 뭔가 대단해 보이고, ‘시지푸스적 삶’이라고 쓰면 또 조금은 멋져 보이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엔 산다는 게 지리멸렬하다는 푸념일 뿐이다.

사랑하는 조카가 결혼생활에 낙담할까봐 작가가 당부하려던 말은 그러니까, 까뮈가 알려 주었듯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이는 매일의 고통스런 상황 전체를 포용하라는 것이었다. 신이 형벌로 내린 끝없이 반복 될 바위 밀어 올리기이지만, 어쩌면 (나라면) 전격적인 매듭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과감히 등을 돌리는 순간, 비로소 하루하루가 희망적으로 다가올 거라고 했다. 끝내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산 정상에 이르자마자 또다시 무의미한 일의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서도 다음번에 바위를 밀어 올릴 새로운 방법을 자유롭게 선택하자는 얘기였고, 그렇게 매번 온힘을 다해 맞섬으로서 우리를 짓누르는 운명을 향해 웃어주자는 거였다. 이를테면 일주일 내내 매일 다른 앞치마를 일곱 개의 自由意志인 양 말끔하게 갈아입어 가면서.

뵌 적은 없지만 신덕재 선배님의 글을 좋아하는데, 시험 날 새벽만 되면 (수험생의 터부를 알 리 없으시니) 천지신명께 치성 드리시려고 쪽머리를 풀어 감으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는 부분에서는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내 깐에는 인텔리요 콧대 높은 엄마지만, 내 아이들 역시 제 방 책상 앞에서 때때로 나를 원망하겠지. 그렇지만 훗날 신덕재 선배님처럼 ‘그 때보다 엄마 없는 지금이 더 싫다.’라고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 할 거 같다.

새해에는 달라질 일들도 물론 있겠지만 쳇바퀴 같은 매일도 산적한 문제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성취하려면 반복에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방어적 태도 정도만으로도 나쁠 건 없겠지만 가능하면 반복이 결코 형벌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일곱 개의 앞치마를 조카딸에게 준 분 이나 아들 시험 날 새벽마다 머리감기 리추얼의 추억으로 (뵌 적도 없건만)그리워하게 만든 분이 내게 가르쳐 준 따스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꾀 많고 삶의 의지로 가득차서 신마저 감쪽같이 속여 결국 永生을 얻어낸 시지푸스와는 달리 우리는 딱하게도 이 누추한 일상이나마 영원히 반복할 수조차 없다. 다만 초월과 포용과 찬란한 자유의지를 통해 神적인 삶에 조금은 가까이 갈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送舊迎新. 謹賀新年.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