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위대한 치의 쇼맨 ‘Painless Parker’

치의학과 서커스 접목해 막대한 부 일궈
치의학의 윤리 일깨운 극적인 ‘반면교사’


최근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이라는 뮤지컬 영화가 화제를 모으면서 천재 연출가 혹은 희대의 사기꾼 P.T 바넘과 관련된 한 전설적(?) 치과의사의 이야기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위대한 쇼맨은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라는 서커스를 공연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P.T 바넘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동물 털을 물고기에 붙여서 지구상에 유일한 털 달린 물고기라고 대중들을 속이고, 어류의 머리를 원숭이 몸통에 붙여 원숭이 인어라고 소개하는 등 ‘사기적 연출’의 대가였다.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 19-위대한 쇼맨 : Painless Parker 참조)

이 바넘의 일대기에 등장하는 한 명의 치과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Painless Parker로 잘 알려진 Edgar Randolph Parker(1872-1952·이하 파커)다. 권 훈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는 “바넘과 파커의 사이에는 William Beebe라는 서커스단 관리자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파커의 치과의 매니저로 고용되면서 파커는 어마어마한 부를 얻게 됐으나 치과의사로서나 인간적으로서 명예는 실추된다”고 소개했다.

# 아프면 치료비 10배를 돌려드립니다


바넘과 파커 사이의 연결고리인 이 William Beebe가 파커의 치과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바넘에게서 익힌 사기의 기술은 파커의 치과 비즈니스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William Beebe는 45년 동안 바넘의 서커스단을 진두지휘한 연출의 전문가였다.

사실 파커의 첫 개원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는 1892년 2년 과정의 Philadelphia Dental College를 졸업하고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 자신의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 치과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6주 동안 단 한 명의 환자도 보지 못할 만큼 철저히 실패를 맛봤다. 절치부심한 파커는 거리로 나선다. 여기서부터 파커의 화려한 성공담이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거리의 치과의사로 나선 파커는 마차에 치과진료대를 싣고 유랑하면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무통발치(Painless extraction)를 광고한다. 그의 영업방식은 이랬다. 치아 한 개당 50센트를 받고 발치 했는데, 고통에 공포를 느끼는 환자들에게 발치가 아프다면 5달러를 돌려준다고 했다. 당시 5달러를 현재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115불 정도 되니 환자로선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역제안이었다. 환자들은 발치 전 독한 위스크나 코카인 용액 등을 마시고 취한 상태가 됐고, 이틈에 파커는 환자의 치아를 발치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모았다.

이 성공을 발판 삼아 파커는 화려한 재기를 노린다. 뉴욕으로 간 파커는 본격적으로 치과 사업을 확장하려고 노력했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위에서 언급한 William Beebe를 만나게 되고, 그를 영입한다. 치의학과 서커스가 만나게 되는 계기다.

이때부터 이른바 파커의 치과 서커스는 빛을 발한다. 치과 서커스단은 쇼걸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호객행위에 나섰고, 악단은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해서 치료 받는 환자들의 비명소리를 덮었다. Painless Parker의 명성은 굳어져갔고, 막대한 부를 거머쥐면서 더욱 공격적인 경영에 나서게 된다.

권 훈 이사에 따르면, 파커는 영민한 비즈니스 실력으로 폐원 직전의 작은 개인 치과를 인수하고, 약 30여 개의 치과를 운영했다. 그의 1년 그로스는 당시 약 300만 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50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고, 소유의 치과들을 다른 치과의사들에게 임대해 주는 방식으로 부수입을 올리기까지 했다.

1915년 캘리포니아 치과의사협회는 파커를 고소하고, 그동안 환자들을 유혹했던 Painless Parker라는 치과명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맞서 파커는 묘수를 둔다. 아예 이름을 Painless로 바꿔버린 것이다. 과대과장, 현혹성 광고라고 지탄 받았던 Painless라는 형용사를 아예 고유명사인 이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응대했다. 합법적으로 Painless라는 상호를 쓰게 된 파커는 Painless Dentist 네트워크를 미 전역에 오픈하게 된다. 연구소를 설립해 협회와의 전쟁에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막대한 광고를 내 “동료들이 수입 감소로 나를 공격한다”는 요지의 캠페인을 이어 갔다. 우리 치과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매치되는 대목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파커가 오명만 남기고 떠난 뒤 그의 아들의 상황. 파커의 아들 네드 파커 역시 치과의사였지만, 아버지의 유산(?)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개원하지 못하고 시골이었던 오레곤 주에서 초라하게 개원의로 살았다.

권 훈 이사는 아들 네드 파커가 남긴 문헌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보냈던 시간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