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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s maketh man

오지연의 Dental In-n-Out

“5만 명이 운집한 웸블리 스타디움엔 환희의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는 스탠드를 가리킨 뒤 자랑스럽게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 일본 언론이 지난 5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터뜨린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중거리포를 보도한 문장이라며 아들이 보여주었다. 함께 봤던 경기여서인지 실감이 났다.
축구팬이라기보다는 축구팬의 엄마일 뿐이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 곁에 앉아 헤어스타일로 선수 이름 맞추기를 하며 보내는 형편이라 골 장면 정도는 되어야 기억이 나는 것이다…하하하.
불과 몇 분전에 웨스트 햄의 오비앙이 성공시킨 엄청난 선제골로 0:1로 리드 당하고 있었던 토트넘 이었다. 패스를 받았을 때 상대 미드필더 3명과 수비수 5명 등 8명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손흥민은 눈앞의 작은 공간으로 살짝 트래핑 한 뒤 바로 오른발로 대포알 같은 30m 중거리슈팅을 했고,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가는 공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캐스터는 “손은 마치 페드로 오비앙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눈부신 골을 보여주네요! 오늘 밤 웸블리에는 슈팅스타들이 즐비하군요!” 라고 소리쳤고, 관중석의 한 팬은 두 살 쯤 되어 뵈는 아들(또 한명의 팬의 가족!)의 볼에 마구 뽀뽀를 했다. 4:0의 대승을 거둔 14일의 에버튼 전까지 홈 5경기 연속득점의 대기록을 세우며 손흥민은 현재 EPL 23라운드 파워랭킹 2위이다.

우리나라 선수를 칭찬하는 일본 언론이란 사뭇 낯설지만, 아마 완곡하게 표현해도 ‘편견’ 정도가 한계일 정도로 인종차별이 여전한 유럽이 그 무대라서 일 것이다.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하루 바삐 고쳐야 한다는 자각과 결심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만으로 눈감아 주긴 어렵다.

본드 스트리트의 고급 숍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수위가 입구를 지키며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손님들을 입장시키기도 하고 저지시키기도 한다. 매장 안이 혼잡해 지지 않도록 이라는 게 나름대로 내세우는 이유지만 잠깐만 지켜봐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축구에선 유색인종이라 해도 전통적으로 기량을 검증받은 아프리카계나 히스패닉 등의 위상이 아시아계보다 높은데, 굳이 납득하려 들자면 잘 하는 아시아 선수를 본 기억이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것이다. 차범근과 박지성이 그래서 멋진 것이고, 향후 유럽의 축구팬들에게 아시아인(일본인 포함)선수가 얼마나 달리 각인될 지를 예견하는 일본 언론이기에 손흥민을 저토록 칭찬하는 것이 아닐까. 호라티우스가 말했듯이 남 얘기도 결국엔 다 ‘너 자신에 관한 얘기(de te fabula:데 테 파불라)’인 것이다.

손흥민의 골 영상을 보면 ‘말이 필요 없다.’ 라는 캐스터의 호들갑에 수긍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 말이 필요 없어졌던 순간은 경기 후 인터뷰 때였다. 우선 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멋진 골이었다.’며 상대팀의 오비앙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기자의 ‘너의 골 역시 아름다웠다’는 칭찬에는 아름다운 골 보다는 1:1로 끝나버려 승점 3점을 얻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고 대답했다. 맙소사, 그는 진짜 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질문, 혹은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을 본인이 앞질러 정확히 말해 버리는 선수에겐 에고를 떨쳐내고 철저히 스스로를 타자화 할 줄 아는 메이저급 플레이어의 늠름함과 젠틀맨의 품위가 있다. 웨스트햄의 골문을 가르던 환상적인 슛보다도 산뜻한 인터뷰 매너가 그를 스무 배는 더 멋져보이게 했다. 물론 축구팬과 축구팬 엄마 맘이 모든 면에서 같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만.

투자금을 많이 잃었거나 조금 더 투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혹은 나도 진작 할 걸 등등의 원인으로 투자자와 비 투자자를 가리지 않고 엄습해 온다는 ‘비트 코인 블루’라는 우울증이 유행이라는데, 타인에 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해진 것이야말로 고귀한 것이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상대를 칭찬함으로써 나까지 훌륭해 보이도록 하는 멋진 매너를 가지려 노력한다면, 누구든 코인 우울증보다 젠틀맨 쪽에 훨씬 가까워질 텐데.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