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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여행의 가벼움

Relay Essay 제2274번째

프랑스 여행 첫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쳤다. 공항에서 울며 고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비행기표를 구매해야 할지.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항 사건을 포함한 지난 여행에서 일어난 일들도 오직 한번 뿐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일까.

내 여행은 가벼웠다. 주머니 사정도 그랬고 계획도 그랬다. 비행기를 놓치고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공항에서 당일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표를 사느라 비행기에 앉아 보기도 전 여행 예산의 반을 이미 탕진해버렸다. 게다가, 설상가상 여행 4일째 가방을 도난당하는 사건으로 주머니가 2/3쯤 가벼워진 상태였다. 비행기표 가격은 추석 직전이라 어마어마하게 사악했다. 11시간 비행 내내 잠이 한 숨도 오지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가벼워진 주머니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착, 출국 일정 이외엔 아무 것도 정하지 않은채 비행기를 탔었기 때문이다.

반은 울고 반은 기도하며 파리에 도착했다. 쾅! 하고 입국도장을 받는 순간 그래, 계획 없이 온 것이 나의 계획이야 라며 나를 위로했다. 어차피 한번뿐인 여행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울 수 있듯, 이렇게 계획 없이 오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드릉드릉 빈 케리어를 끌고 공항 밖을 나가 시내로 향하는 RER(프랑스 고속 교외 철도)를 탔다. 딱히 검색해둔 맛집은 없었지만 날씨와 풍수에 어울린다고 여겨진 곳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다. Grand Coeur라는 그 식당은 2층에 재즈댄스연습실이 있어 음악을 들으며 무용수들의 실루엣을 보며 식사할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모든게 무모했던 시작인데도 당장 내일 어디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마취제가 정맥에 퍼지듯 푹 쓰러져 잤다. 얼마나 깊이 잤는지 겨우 두 시간을 자고 깨어나서도 느낀 개운함은 잊을 수가 없다. 계획으로 부터 가벼워진 어깨 덕분에 받은 여행의 첫번째 선물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어느 하루는 아무 계획 없이 어느 매거진에서 읽다 기억에 딸깍하고 걸리는 (익스플로러가 우식에 걸릴 때) 여운을 남긴 Ritz Paris 호텔을 구경해보기로 했다. 그 날은 파리의 fashion week가 열리던 주였고 나는 도착할때까지도 그 사실을 몰랐다. 코코샤넬, 헤밍웨이, 스콧 핏제럴드가 묶었다는 바로 그 호텔은 방돔 광장 한 쪽에 있었다. 다짜고짜 해밍웨이가 갔던 bar에 꼭 가고 싶다고 하자 친절한 직원은 원한다면 호텔 이곳저곳도 구경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어쩌다가 혼자 여기에 왔냐는 동정의 눈빛인지 나도 fashion week 때문에 온 사람인줄 착각 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리츠에는 많은 스타들과 유명인들이 와 있었다. 몰래 그들 틈에 끼어 다이애나비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비롯한 호텔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었다. 세상에, 영화에서 보던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다니,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또, 파리에서는 다른 여러 우연적 필연의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치과 원장님을 뵌 일이 가장 무계획적이며 완벽했다. 만나기 한시간 전까지도 어디서 만나 무얼 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로 만나 에펠탑과 루브르, 그리고 파리 시청을 거쳐 베아슈베 루프톱을 보게된 사건은 계획 없는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일 중 하나이다. 그 밖에, 가장 큰 보름달을 본 일, 유명 디자이너 갤러리에서 진짜 그 디자이너를 마주친 일, 지나가다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유명한 빵집인 일 등 빈 손으로 떠난 여행 치고는 묵직하게 감사한 일들이 많았다.

그렇게 2주간 지낸 파리를 떠나야 겠다는 생각이 든 날 렌트카를 예약했다. 목적지는 보르도(Bordeaux)였고 경유지는 노르망디(Normandie) 해안의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이었다. 몽생미셸을 보고싶었던 이유는 ‘Lonely Planet(여행서적)’ 프랑스 편에서 봐야 할 것 1번으로 나왔던 기억 때문이다. 가서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정하지 않고 떠나는 길은 묘한 불안함과 긴장감이 섞여 설레임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하지만, 도착한 곳엔 몽생미셀이 없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모든 조명이 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푹 자고 일어났다. 안개낀 아침, 힘 없이 빵과 치즈를 먹고 있는데 숙소 앞으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두마리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수십 수백마리가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얼마나 바쁜지 바로 옆에서 바짝 붙어 사진을 찍어대는 나 조차도 안중에 없는 듯 했다. 몇십분을 그렇게 양떼 가운데 서서 양들의 출근을 목격했다. 어느 여행 책자나 블로그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몽생미셸의 양떼 출근! 나만의 오센틱(authentic)한 여행을 하는 기분에 행복했다. 아무생각 없이 지낸 숙소에서 수백마리 양떼를 보다니. 내가 양떼를 보려고 시간 맞추어 왔다면 막상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얼굴이 까맣고 털이 보글보글한 양들은 그렇게 점점 멀어졌고, 그 양떼를 본것 하나만으로 몽생미셸에 오기 잘 했다는 뿌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몽생미셀에서 보르도로 내려가는 길에는 루아르벨리(Loire Valley)라는, 고성들이 밀집한 동네가 있다. 갑자기Chateau (말로만 듣던 샤또!- 영어로 번역하면 castle(성))를 구경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이렇게 뭔가 알지도 못하면서 꽂히면 해보는 데에서 오는 희열이 있다. 게다가 내가 언제 또 여기를 지나가겠냐는 생각에 이미 목적지는 루아르벨리의 투르(Tour)지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유명하다는 샤토만 10군데가 넘었고, 무계획이었던 나는 당연히 딱히 가고싶은 샤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간은 벌써 3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여행중 어둠이란 ‘숙소로 돌아갈 시간 = no more sightseeing’ 같아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배가 고파 들린 식당 두 군데 모두 break time이었고, 작은 시골 동네에 늦은 오후에 연 식당은 없을거란 주인의 조언을 들었다. 무작정 핸드폰 어플을 켜고 잠깐 눕기라도 할 숙소 검색을 했다. 샤토 뭐뭐뭐 라고 적힌 평점 높은 숙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당장 예약이 안될거 같아 일단 주인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저녁 계획도 없으니까.

도착한 곳은 정갈한 정원이 입구부터 대문까지 길게 가꿔진 고풍스런 유럽의 맨션이었다. 리뷰에서 읽은 집주인 Eric은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대체 여길 어쩐 일로 왔냐는 눈치였다. 지나가는 길인데 하루 잘 방이 있냐고 물어봤다. 고급스러운 맨션 주인에게 할 멘트는 아니었지만. Eric은 마침 오려던 손님의 비행기가 딜레이되어 방 하나가 빈다고 했다. 1780년도에 지어진 이곳은 당시 추기경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Eric의 멘션은 대대손손 모아온 앤티크와 예술품들로 가득 꾸며져있었고 19살 된 강아지가 이미 아는 사이처럼 반겨주었다. 지나가다 찾은 숙소가 완벽하게 예쁜 탓에 신이 났다. 무계획의 장점은 이럴때 있다. 실패해도 실망이 덜 하지만 성공할때 기쁨이 제곱의 제곱이 된다. 그렇게 Eric의 샤토에서 하루를 자고 주인장의 친구가 운영하는 La Cave라는 동굴식당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먹었으며, 예정에 없던 하우스 와인을 사와 부엌에서 빌린 1970 바카랏 빈티지 와인잔에 따라 마시며 생각했다. 내가 모든 것을 계획했더라면 지금 이순간이 있었을까.

보르도에 가기 전 차를 돌려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밤 늦은 시각 네비게이션은 논두렁 같은 길로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 마을 중간을 가로지르게 했는데 쏟아지는 별빛에 차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려 난생 처음으로 은하수를 보았다. SF 우주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별이 수 없이 많았고 그런 하늘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별이 창조된 창세기 성경구절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했고 온몸이 떨렸다, 그렇게 파리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고 한참동안 별을 보다, 다가오는 희미한 다른 차의 불빛을 보고나서야 다시 차에 올라 파리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가벼웠기 때문에 택한 순간의 선택들 덕분에 우연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필연적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선택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리허설없이 선 무대 위 공연처럼 단 한 번뿐인 순간들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가장 소중했던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