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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는 묻지마’

시론

“다섯 번에 한 상이요오~!”   

유리문밖에서 손님이 들어오기도 전에, 어찌 다 아는지 주문과 테이블번호까지 주방에 외쳐버리는 이 식당은 필자가 17년 넘게 다닌 점심단골식당. 열 개가 넘는 메뉴가 있지만,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은 들어서는 손님들의 태반이 거의 매일 오는 단골인지라 뭘 주문할 지 이미 안다. 바쁜 점심시간의 주문은 대개 굴국밥 아니면 ‘오늘의 백반’인데다가,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의 얼굴과 즐기는 메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손님 앉기도 전에 주방에선 조리가 시작된다. 자기의 식성을 기억해주고 앉을 자리도 정해주며 바쁜 일과에 몇 초라도 서둘러주는 곳에 점심하러 가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취향에 딱이고, 뭐 드시겠냐고 묻고 여기 뭐가 맛있냐고 되묻고 하는 거 없이 후다닥 주문 들어가는 건 식당주인도 종업원도 대환영이다.

이렇게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공감하고 ‘알아서’ 프로세싱이 되어지는 소통의 약속을 가진 문화를 소위 “고맥락문화 high context culture, E.T. Hall, 1976”라 일컫는다고 한다. 일견 그 상황에 관련된 참여자들의 소통과 단결력이 뛰어나 보이고, 집단목표지향적이며,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지 않는 단순한 목적성취에는 매우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에 영향받거나 창의성과 개성이 존중 또는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심각한 오류나 돌이킬 수 없는 피해로 이어진다는 단점을 가진다.
반대개념인 “저맥락문화(low context culture)”는 눈앞의 뻔한 상황과 상식적인 경험들도 상대방과 확인하고 명문화된 법과 규정에 의존하기를 원하고, 상황에 참여하고 있는 개개인이 서로 인지하고 받아들인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상호확인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성향을 지닌다.

“알아서 잘해!”라는 말에 익숙하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라는 말을 아랫사람에게 거침없이 해대는 우리는 필시 고맥락문화에 가깝지 싶다.

필자의 부친께 들은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려드려 보고자 한다. 80년 전통의 곰탕집인 하동관이 지금의 명동으로 이전하기전 원래 자리인 삼각동에 있을 시절이었다. 한 손님이 곰탕을 주문하고 “여기 냉수 한 잔 주소!” 하니, 금세 유리컵에 냉수를 내오더란다. 갈증이 심하였는지 단숨에 컵을 비운 손님은 입으로 냉수를 내뿜으며, “이게 물을 달랬더니 웬 소주를 주는거야?” 라고 버럭 화를 내는 손님에게 유유히 다가온 늘그막의 남자종업원이 “우리집은 냉수 한 잔 달라시면, 맥주잔에 소주 드려…” 라고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대답하며 곰탕기름 절은 통나무식탁위에 행주질만 하는데, 소주 뿜은 손님 더 황당한 건 거기서 식사하던 손님들 모두가 ‘그것도 모르고 여기 왔냐?’는 듯한 시선으로 자기만 쳐다보며 곰탕에 숟가락질들 하더란다. 소주병 세워두고 낮술 하는 흐트러진 모습이 혹시라도 목격되는 게 조심스러운 금융기관직원과 행정관료들이 하동관에서 만들어낸 그들만의 약속이 빚어낸 이 풍경은 ‘잘 모르면 큰 낭패’의 가능성이 있는 고맥락문화의 웃지 못할 일면이다.

“잇몸에는 OOO~!”라며 인심 좋은 역할 많이 하는 친근한 탤런트를 시켜 광고를 한다. 그냥 치아가 좋아보이는 사람이 TV화면에 나와 ‘이게 약이다’라고 하면 믿어주는 게 고맥락문화다. 시시콜콜 어느 기관이 인증했고, 어느 학술잡지에 관련증거가 어느 수준의 유의성으로 보고되었느냐며 저맥락문화人 행세를 하면, 곰탕집에서 소주 뿜은 사람되기도 한다. ‘자세히는 묻지마’라는 고맥락소통의 사회문화적 토양은 긴 말 필요없는 장사하기 쉽다.

그러나 고맥락문화의 소통엔진이 매끄럽게 작동하기 위한 기본 플랫폼은 구성원들 간의 깊은 상호이해와 혹시라도 오해가 생겨도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호의적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자세가 모두에게 준비되어있을 때 견고하게 기능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지나는 시대와 사회는 상호간의 이해와 신뢰가 예전처럼 넉넉지 않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고맥락소통 수단을, 저맥락소통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부문들에도 분별없이 습관처럼 고집하고 들이대려 한다면 오해와 혼란과 갈등과 분열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분히 저맥락문화라 간주되는 서양은 소통의 과제에서 성공을 거두었을까? 길게 얘기할 지면이 없는 까닭에 두어 개 예를 들어 본다. 서양의 어느 이가 말하기를 “상호간에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건, 계약 쌍방이 성공적으로 상대를 속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라는 내용과, 미국문화에 대한 냉소적 비판자로 대변되는 마크 트웨인의 “설교가 20분을 넘으면 죄인도 구원받기를 포기한다” 는 짧은 말에서 저맥락문화의 답답함이 고백되어지고 있음을 엿본다. 역시나 늘 그렇듯 하나로 정답을 낼 수 없음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적용이 있을 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여러 말 필요 없는 고맥락문화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가 아닌가싶다. 저맥락소통은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한 방법이고 과정일 뿐….

우리 치과계는 내부의 소통과 외부와의 소통에 많은 과제가 있다. 내부는 고맥락문화라 쉬운 듯 어렵고, 외부와는 저맥락상황이라 낯설고 두렵다. 내부적으로는 어떻게든 이해와 신뢰를 더 쌓아야하고, 외부적으로는 아주 많이 더 배우고 경계해야 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호
서울 중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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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