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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같은 고양이

스펙트럼

어느 날 새벽, 우당탕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잠결이지만 대충 무슨 사연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보나마나 고양이들 중 누군가 사고를 친 거겠지… 뭘 넘어뜨린 걸까? 화장대 위에 올려둔 로션? 쓰레기통? 컴퓨터 마우스? 축 늘어진 몸을 겨우 일으켜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희끄무레한 녀석이 방구석으로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러흐’ 너 였구나,  조금 있다가 두고 보자…하고는 쓰러져 다시 잠을 청했다.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난 나는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을 보게 되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접이식 거울이 방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있고, 삼색고양이 러흐가 엎드린 채로 그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공주병에 걸린 10대 소녀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푹 빠진 고양이라니! 내가 신기한 듯 빤히 쳐다 보자, 러흐는 방해 받아서 귀찮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를 떴다.

여우 같은 고양이 러흐는 우리 집 막내이다. 젖소무늬 고양이 ‘토흐’, 치즈 태비 ‘치흐’에 이어 내가 세 번째로 입양한 고양이이다. 쌀쌀한 초봄에 길에서 태어난 러흐는 몇 개월 동안 골목에서 혼자 자랐다. 어미로부터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동네 화단에서 숨어 지냈다. 용케 살아남긴 했지만 역시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깡 마르고 피부병도 생겼다. 결국 사람들에게 구조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러흐는 시크한 집고양이인 토흐와 길에서 태어났지만 눈도 뜨기 전에 구조된 치흐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막 입양된 러흐는 식탐이 엄청 나서(사실 지금도 그렇다.) 3마리분의 사료를 혼자서 싹싹 비우는 것은 기본이었다. 식탐 강한 친구들이 자신의 짜장면을 먹기 전에 탕수육을 먼저 먹는 것처럼, 러흐는 각자의 그릇에 공평하게 나누어 담긴 간식보다 함께 먹는 간식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정말 똑똑한 고양이이다. 다른 고양이들은 행거에 걸어둔 옷을 건드리다가 나한테 혼도 많이 났는데, 러흐는 내가 없을 때만 건드린다. 그냥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발톱으로 걸레를 만들어 놓는다.  나는 러흐 발톱에 끼어있던 실오라기를 보고서야 그게 러흐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욕을 하고 난 후, 젖은 털을 말리기 위해 가장 먼저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드러눕는 것도 러흐다. 아침에 사료 그릇이 비워져 있을 때, 빈 그릇을 시끄럽게 굴리고 다니면서 내 잠을 깨우는 것도 러흐다. 배 고프니 밥 달라고 하는 소리인데, 정말 시끄러워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토흐와 치흐는 수컷이라 덩치가 크다. 러흐는 암컷인데다 어리고 늦게 입양되었으니 확실히 서열은 밀린다. 러흐는 잠을 자다가도 오빠가 어기적 어기적 다가오면 스스로 먼저 자리를 양보한다. 하지만 러흐는 또 금방 명당 자리를 찾아내고 자리를 잡는다. 가끔 오빠들이 서열 싸움을 하며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도 러흐는 그냥 누워서 구경만 한다. 치흐가 괴롭힐 때면 욕실로 도망쳐서는 치흐를 샤워부스에 가두고 혼자만 빠져 나오기도 한다. 러흐는 작은 앞발을 구부려 샤워 부스 유리문을 요령껏 여닫을 수 있다. 가끔 내가 네모난 그릇 하나에 츄르(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간식, ‘잼’ 처럼 생겼다.)를 담아줄 때가 있다. 그러면 토흐와 치흐가 먼저 머리를 박고 티격대며 츄르를 먹는다. 서열이 달리는 러흐는 옆에 앉아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오빠들이 다 먹고 나면, 앞발로 그릇을 돌려가며 네 군데의 모서리에 끼어 있는 츄르를 야무지게 핥아 먹는다. 따로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먹는다. 사실 그릇 모서리에 끼어 있는 양이 상당한데 두 수고양이들은 귀찮은 건지 재주가 부족한 건지 배가 부른 건지, 러흐처럼 야무지게 챙겨 먹지는 못한다.

러흐는 날아다니는 것에 관심이 많다. 날벌레, 창문 밖에서 내리는 눈, 오리털 점퍼에서 떨어지는 깃털 조각… 이것들을 발견할 때 마다 러흐는 나를 보고 울어댄다.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러흐는 창가에 앉아 눈을 떼지를 못한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워서 때로는 눈이 내렸으면 싶기도 하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가시 돋치게 울어대고 말썽도 많이 피웠는데 언제 이렇게 컸을까, 눈치도 빠르고 관찰력과 손재주 모두 뛰어난 고양이 러흐.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훌륭한 치과의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왠지 시집도 잘 갔을 것 같아, 나는 요새 러흐의 여우 같은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딸바보가 되는 것일까?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유란 원장
모두애(愛)치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