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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늦가을 서울대 총동창신문 부고란을 보고 C교수(최선진 교수)가 작고 (2015. 9. 17)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치의학대학원에서 경조사를 카톡으로 보내오는데 정년 15년차인 저에게도 타교 출신 현직교수의 장인상까지 알려주니 고맙기도 하고 글쎄요.

교수(명예교수)에게 일괄적으로 메일을 발송하기 때문이라는데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러한 결례는 하지 않겠지요.

C교수는 서울대 교수요원 충원계획에 의거 1980. 3. 7일 구강미생물학 교실 조교수로 특채 되었는데 당시 김각균 교수는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해였고(김각균 교수자료제공) 정년(2006. 2. 28)할 때까지 26년간 봉직하고 명예교수로 추대 되었습니다.

C교수의 정년 축하연은 2006. 3. 8일 종로 한일관에서 했는데 이것은 “2006년부터 명예교수 축하연은 별도로 한다”라는 기획위원회 결의(학장 정필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C교수는 같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자연대를 졸업해 저희 대학으로서는 타교 출신 제1호 교수 이었습니다. 전에는 대학에서 주관하는 축하연은 큰 호텔에서 했는데 C교수의 정년축하연부터 이렇게 하게 된 것이지요.

2018. 3. 1일 기준으로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전임교수는 치의(D.D.S.) 79(본교 67, 타교 12), 비치의 (Non D.D.S.) 23, 계 102분이 있는데 임명 이후 비치의 교수는 23배 증가로 치대는 김영란법(2015. 3. 27일 제정·공포, 2016. 3. 27일 시행) 보다 10년 전에 실천한 것이지요.

C교수실은 언제나 책장과 책상 위가 말끔히 정돈되어있었고 C교수는 한 손에 크리넥스로 책 위를 닦으면서 대화했습니다.

결벽증이냐(?) 했더니 제 방에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러던 그의 사망명은 자가면역질환에 따른 다발성 동맥염입니다.

C교수 부모님은 북에 두고 온 두 딸을 그리워 하셔서 휴전선 가까운 포천에 장지를 준비해 두었다는데 본인도 그곳 부모님 곁으로 갔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2호관 앞에 세워둔 승용차에서 C교수와 L조교가 열심히 무엇인가 하고 있어 무슨 일이냐(?) 했더니 엔진오일 교환 중이라 했습니다. 아니, 근처 배터리 집에 가면 쉽게 교환 할 수 있는데 이 추운 날 무슨 생고생이냐 했더니 미국서 부터 이렇게 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소한 것인지, 융통성이 없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었지요.

30년 전인 1988년 2학기 기말시험이 시작된 어느 날 점심 후 제 방에 들어오니 몇 사람이 저를 만나기 위해 부속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무담당 학장보(현 교무부원장)로 있었는데 졸업정원제(120%를 입학시킨 후 졸업 때는 20%를 탈락시킴) 때문에 시험기간이면 학생들이나 교수나 모두 긴장하게 되고 두 번 연속 학사경고(평균 D학점 이하)를 받으면 곧 제적되는 시절이었습니다.

저를 기다리던 분들 중에서 TV에서 나오는 콜롬보 형사처럼 회색 바바리를 걸친 분이 먼저 문을 열고 사방을 살피면서 들어오더니 문을 닿았습니다.

어느 출판사나 기재상에서 온 사람 같아서 그 문은 닫지 말고 열어 두라고 하자 신분증을 보이면서 안기부(지금은 국정원)에서 나왔는데 우리대학 C교수에 대해 몇 가지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시다면 학장실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하니 저에게 직접 알아보면 된다면서 잠시 제 방에 출입하는 사람이 없도록 통제해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어떤 일로 오셨는가 묻자 C교수의 해외여행 기록과 그동안 C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모두 복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리한 요구라면서 우리 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은 사회문제를 언급한 것은 없다며 사유를 묻자, 최근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산 출신 모 국회의원 아들이 북한 대사관을 거쳐 월북(납치?)되었는데 C교수가 유럽에 있는 우리 유학생 주소록을 북한에 넘겨준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C교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이분은 최근 C교수는 일본에서 있었던 학회에 참석한 후 호주를 거쳐 귀국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학회 (JADR)에 갔던 C교수가 얼굴이 까맣게 타서 왔기에 어쩐 일이냐 했더니 지금 호주는 여름이라서 해변에 나갔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해외공무 여행을 할 때는 목적지나 경유지를 써내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는데 C교수의 경유지에 호주는 없었습니다.

C교수는 평소 말이 없고 구내식당도 혼자서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저는 그 안기부 사람 말을 들으니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다녀갔다는 말은 C교수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까지 내리고 몇 가지 자료를 복사해 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지나서 정권도 바뀌었고 어느 해 신학기 교수 세미나에 가는 길에 같은 버스의 옆자리에 C교수와 앉게 되었는데 C교수는 자연스럽게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C교수는 지금도 중국에 있는 어느 북한 동포(?)를 통해 자기 친동생들에게 돈을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C교수 가족은 1.4 후퇴 때 피란 열차를 타고 개성 근처까지 왔을 때 갑자기 UN기의 오폭으로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는데 정신을 차려 부모님은 만났으나 어린 두 여동생은 찾지 못한 채 그 피란 열차는 남으로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 열차의 어느 곳엔가 타고 있는 줄 알았던 어린 동생들은 북새통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피란민을 싫은 기차는 어디로인가 떠난 후였고, 당시 9세 전후의 동생들은 기차 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다는 것이 다시 북으로 올라가게 되었답니다.

지금 이 여동생들은 결혼도 하였고 조카들도 사진으로 보았는데 가족들이 월남했다 하여 평양에서 쫓겨나 함경도 어디인지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보내 달라는 편지가 오는데 그곳 간부(?)들이 시킨 것 같지만 그래도 얼마는 전해 주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나 딸들 생각에 병도 얻으시고 이산가족 면회 신청도 해 보았으나 언제가 될지 기대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C교수를 이상하게 본 것이 미안했습니다. 저도 C교수와 같은 이산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들이 되셨지만 제가 대학에 재임할 때 이북에 가족을 두고 단신 월남하셨던 원로 교수님이 몇 분 계셨습니다. 1983. 6. 30일 부터 시작된 ‘KBS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이 진행될 때 저는 K학장님께 가족 찾기 방송에 신청해 보시라고 했더니, 이봐, 김 교수 잘 모르는군. 가족을 찾고 있다는 것이 이북에 알려지면 그 즉시 내 가족은 월남한 반동가족이라고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진다네.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가족들이 조용히 지내시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

C교수, K학장님과 작고하신 월남 월로교수님들, 삼가, 이번 구정기간에도 천국에서 그리던 가족들과 상봉 하셨기를 상상해 봅니다.

김철위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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