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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Relay Essay 제2287번째

평범한 단어에도 맨 처음을 의미하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뭔가 더욱 설레고, 긴장되고 애틋한 느낌이 든다.

첫 단추, 첫 눈, 첫 만남, 첫 환자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만든 첫 의치.

지난 5월의 어느 날, 1년차 초반 이제 막 의치를 주소로 내원하는 신환들을 받기 시작하는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위, 아래 틀니를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내원하셨다. 고령의 나이에 비해 정정하시고 보호자분도 없이 혼자 내원하신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하셨다. 기존의 의치는 사사로 제작하셨으며 10여 년간 사용하셨다고 했다. 대학병원에 내원하시는 다른 흔한(?) 무치악 환자분들처럼 하악의 심한 치조제 흡수로 구내검사 후 내가 새 의치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기존 사용하고 계시는 의치에 비해서는 조금 더 잘 만들어 드릴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기도 하였다. 보호자분도 없이 귀도 잘 안들리시는 상태라 치료과정, 치료 기간, 비용, 예후 등에 대해 겨우 겨우 설명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나의 설명과는 상관없이 여기서 틀니를 새로 만들겠다는 답은 이미 정하신 상태였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할아버지께 설명드리는 것은 치조제 흡수된 환자의 의치를 만드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는데 할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온 외래가 떠나가도록 소리 높여 말씀드려야 했다. 때로는 주변 동기, 선배님들은 다 듣고 웃어도 정작 할아버지는 듣지 못하는 일도 흔했다.

매번 내원하실 때 마다 ‘오늘은 어떤 과정을 했고, 다음번에는 저런 과정을 할 거에요.’ 하고 설명해드려도 항상 마지막 말씀은 ‘그래서 언제오라고? 다음번에는 틀니 주나?’ 하셨다.

드디어 완성된 상·하악 의치를 장착하는 날 ‘아버님 오늘 틀니가 나왔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야 이놈아 틀니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냐’ 라고 하시던 할아버지.

말투는 흔한 경상도 할아버지셨지만 멀리서 오시고 꽤나 힘든 과정이셨을 텐데도 큰 불평 없이 잘 따라와 주셨다. 한 번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못 사왔으니 받으라’며 용돈을 건네셔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런 거 받으면 절대 안된다고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가 주는 건 괜찮다’하시고 내가 끝내 받지 않자 서운해 하셨다. 항상 다정히 ‘오선생~’ 하고 불러주셨고 서툰 손길이 느껴지셨을 법 한데도 오실 때마다 이전보다 좋아졌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 완성된 의치 장착 후 정기점검 때마다 내원하시면 틀니가 참 잘 만들어졌다며 칭찬해주시는데 이때는 할아버지께서 귀가 안들리셔서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점이 더욱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올려 보니 보철과 전공의로서 첫 의치 환자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건 참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내원하는 비슷한 연령의 할아버지, 할머니 환자분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이 분을 떠올리면서 미소 짓게 되고 더 잘하고자 다짐하게 된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처음에 대해 떠올려 보시고 약간은 긴장되고 설레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시면 좋겠다.

당신의 처음은 어떠하셨나요?

오유경 부산대치과병원 치과보철과 전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