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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힌 지렁이 꿈틀하기

시론

그제는 순국선열을 기리고 우국충정의 정신을 되새기는 현충일 이었습니다. 올해는 선열 중 한 분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지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안창호 선생은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을 계획한 혐의로 수배자가 됩니다. 순사들에게 쫓기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한국인소년동맹의 5월 어린이 행사에 내기로 약속 한 기부금 2원을 전달하기 위해 이만영 위원장의 집을 방문했다 결국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미련한 행동이지만 구두로 한 작은 약속조차 지키려 했던 안창호 선생의 정신은 도산이 꿈꾸던 해방된 민족과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이 아닌가 합니다.

작년 여름, 문재인 대통령은 본인의 공약에 따라 문케어의 시작을 발표하면서 수가를 정상화해 급여진료만으로 의료기관 경영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수가 협상은 그 약속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첫 시험대였습니다. 하지만 공단은 치협에 1.1%의 수가 인상안을 제시하였고, 9차에 걸친 협상 끝에도 결국 최종안으로 2.0%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통보해 왔습니다. 현실적으로 보험 전면확대가 불가능한 재정 상황에서 무리한 보장성 확대를 위해 의료인의 희생을 강제할 것이라는 우려는 역시나 현실이 되었고, 혹시나 했던 실낱 같은 기대와 희망은 실망과 분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이를 이용해 위정자들이 본인의 치적을 쌓는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전국민의 백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십만 의료인과의 약속은 사실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자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거나 불가피하게 포기해야 할 사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지도자가 가진 국민을 향한 신의에서 시작되고 이는 국민과의 약속 이행에서 싹 틔웁니다. 이 약속은 단지 지도자의 공약이나 정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그가 지향하고 말해온 정치적 가치와 비전에 대한 실천의 삶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말해온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의료인들이 보장성 확대에 협력을 약속하고 많은 부분을 내려놓은 만큼 수가 현실화 약속에 있어서는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수가 정상화를 이루려면 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재정 관리와 수가 협상 과정부터 개선되어야 합니다. 협상과 재판을 할 때 ‘무기평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협상에 나서는 양자는 대등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복지부가 건보공단 운영, 재정 관리, 회계를 담당하고 감독하고 있기 때문에 수가 계약의 당사자가 수가를 제안하고 협상을 진행하고 결정하고 관리, 감독까지 하는 이상한 구조입니다.

협상에 절대적인 정보 싸움에 있어서도 건보공단 이사장은 건보수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심평원에 요구할 수 있는 자료요청권을 가지는 반면 의료단체장들은 이런 권한이 없어 차 떼고 포 떼고 장기를 두는 것과 똑 같은 상황입니다. 눈 가리고 손발 묶인 이런 악독한 상황 속에서도 치협과 의협은 어떻게든 협상을 진행하려 하였지만, 수가 정상화는 고사하고 물가 인상에 역주행하는 삭감에 가까운 통보 앞에서 결국 허탈하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결국 정부 산하의 복지부장관이 수가를 결정하는 이런 심의위원회에 나가서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결국 치협은 건정심 불참을, 의협은 이보다 한 단계 높은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정부와의 마찰과 여론질타를 예상하면서도 이런 초강수를 두는 협회들의 모습을 보면 의료인들의 분노가 전해지는 듯 합니다. 아쉽게도 이 분노는 국민들과 위정자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아주대 외상센터장 이국종 교수님은 의료현장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음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은 전방에 있는 의사들이 온몸으로 그 구멍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의료전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급을 구걸하듯이 요청하였습니다. 얼마 뒤 모 의원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OECD 국가의 8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겨우 70%로 끌어올리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의료인들의 이기심이라고 질타하였습니다. 그 의원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얘기하는 OECD의 평균 의료 수가가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OECD 가입 국가들의 조세부담률 평균이 25%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는 것과 의료의 질을 유지하며 보장성 확대를 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부담하는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것이 불가피 하다는 것은 왜 얘기하질 않습니까? 또 복지부와 건보공단, 심평원에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적정 수가의 기준은 대체 무엇이고 원가 산정 기준은 대체 무엇입니까? 원가에 의료인들의 노동력과 무형의 자원적인 평가는 들어가 있습니까? 평균 6100만원이 넘는 평균 연봉을 자랑하는 2300명 심평원 직원의 연봉 산정 기준은 무엇이고 원가는 얼마입니까?

마지막으로 대통령에게 묻고 싶습니다. 소를 희생시켜 얻은 대를 위한 결과는 정의롭습니까? 한 가정의 배우자이고 아이들의 부끄럽지 않은 부모이고 자랑스런 자식으로 다만 열심히 살아갈 뿐인데… 인건비와 대출금 걱정하는 저 같은 작은 개원의가 1.1%의 인상률을 거부한 죄로 언제까지 욕심 그만 부리라는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강희 연세해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