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회는 올해 초 두 번의 문학기행을 기획했다. 지난 6월, 첫 문학기행을 “대마도를 다녀온 조선통신사 후예들”이란 테마로 다녀왔다. 두 번째는, 수연산방에서 길상사까지, ‘성 바깥 북쪽 동네’ 성북동 문학기행(10월 6일)이었다.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성북동을 답사한 협회사 편찬위원장 변영남 원장님이 안내를 맡아주셨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곳이다. ‘수연’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뜻이다.
해방 전 ‘운문은 지용, 산문은 상허’라는 명성을 얻었던 이태준의 옛집으로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현재는 이태준의 외증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수연산방에 들어서니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안내된 방안에 3단 장식장 맨 위 칸에는 이태준의 ‘문장강화’, ‘상허문학독본’ 고서가 전시돼 있었다.
1939년 10월 29일에 있었던 이태준의 집들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뒤뜰을 액자에 고스란히 담은 쪽문에 시선이 머물렀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단에는 토란, 담쟁이 넝쿨, 그리고 선홍색 꽃들이 석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린 이태준의 집들이가 있던 밤을 환하게 밝혔던 석등이 1939년 그날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11살에 임금이 된 고종이 즉위 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02년에 세운 것이다. 이태준의 저서 <도변야화>에는 “길을 넓히느라고 뜯어 경매할 제” 함석태가 경매로 낙찰 받은 것으로 “진고개 부호가 거액으로 사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고 굳게 보관해온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함석태는 후에 이 비각의 문을 고종황제께 바쳤고 그것이 현재 광화문비각에 남아 있는 것이다.
더 여흥을 즐기다 가라는 이태준 일행을 뒤로하고 우리는 한정식집 국화정원으로 올라갔다. 바로 이곳이 승설암의 주인 인곡 배정국의 고택이었다. 손재형이 이태준의 부탁으로 1945년 4월 5일 청명절(을유년)에 승설암후원을 그린 그림이 “승설암도”이다.
다음 목적지는 만해 한용운의 고택 심우장(尋牛莊), 소를 찾는 집이란 뜻으로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뜻이라 했다. 3·1 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북장골 골짜기에 지은 집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는 남쪽에 등을 돌려 북향 산비탈에 북향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볕이 잘 드는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을 용기가, 사람들이 ‘예’라고 순응할 때 ‘아니다’라고 일제에 저항했던 시인의 외침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심우장 좁다란 골목길을 내려와 길 건너 김용준의 고택 앞에 섰다. 복개천 위로 흐르는 도로를 따라 맞은 편에는 고급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전벽해였다.
정사보다는 야사가 흥미롭듯이, 김용준이 살던 주택을 서양화가 김환기에게 매매한 스토리가 재미있다. 김용준이 수화 김환기에게 집을 팔고 나간 후 집값이 많이 올랐다. 그래서 김환기는 김용준을 만날 때마다 밥을 사주거나 예술품을 선물하는 거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김용준은 김환기에게 자신의 집을 사고 집값이 올랐으니 잘된 일이라며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가격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 힘들게 한다.
김용준의 고택에서 길상사까지는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오르막길이고 주위가 어둑해져서 차로 길상사를 다녀오는 것으로 성북동 가을 문학기행은 마무리되었다.
건축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체되기도 하고 오랜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내기도 한다. 사람의 손길이 깃들지 않는 건축물은 어느 순간 그 생명을 다하고 만다. 성북동에 살아남아 숨 쉬는 건축물들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을 붙잡고 남아 있었다.
수연산방과 국화정원 한정식집, 그리고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성북동 누룽지 백숙집이나 검색해서 왔을 이곳에, 스치듯 하루 지나치면 아무런 기억도 깃들지 않았겠다.
성북동을 드나들었던 근대 예술인들의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여 들으니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였다. 민족유산을 지켜내려고 했던 그들의 희로애락이 들렸다.
임용철
선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