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라면을 끓이며

스펙트럼

딸아이가 일요일 오전부터 집을 비운 날이면, 점심은 라면입니다. 라면은 혼자 있는 사람을 위해 발명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완벽합니다. 딱 한 사람을 위한 포장에, 조리시간도 5분도 안 걸리고, 설거지거리도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얼마나 다양한 라면이 나오는지, 매일 매일 다른 라면으로 바꿔 먹어도 한 달간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라면을 입에 넣는 순간, 상상했던 그 맛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재료를 뭔가 더 넣어줬어야 하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맛의 라면이 아닌 건가. [1박2일] 멤버들이 먹는, 그 맛있는 라면이 아닌 것 같은데.

문득 깨닫습니다. 나는 혼자 먹고 있구나. 예전에 MT 가서 한밤중에 큰 냄비에 서로 젓가락을 밀치며 먹던 그 라면 맛이 아니구나.

가끔 보는 예능 프로그램 중에 [외식하는 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연예인 가족들이, 연인들이, 엄마와 아들이 외식하러가서 먹는 와중에, 한 작가님이 혼밥을 즐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즘은 정말 혼밥해도 좋은 식당도 많고, 혼밥을 하는 것에 긍지를 지닌 분들도 있는 분위기인지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갑자기 그 분께 밥을 같이 먹는 짝꿍이 생겼습니다. 혼자 먹는 장면에서 순간시청률이 급감하여 제작진이 컨셉을 바꾸었습답니다. 요즘은 혼밥이 흔한 일인데도, 남들이 보기에는 역시나 심심한 일이었나 봅니다.

수련의를 마치고 나와서 처음으로 페이닥터를 하던 시기에 그 동네에는 요일마다 갖가지 이름의 점심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농담으로 스스로를 “끼걱사(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 라고 부르시며 점심마다 누구랑 먹을지, 뭘 먹을지가 고민이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혼밥이 흔하지 않았던 20년 전이라 혼자 개원하고 계신 선생님들께는 매일 점심이 고민거리였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짧은 시간에 후딱 먹고 남은 시간에 여유를 즐기지만, 오래 전, 북적거리며 함께 밥을 먹었던 선생님들이 많이 생각이 납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끼니 때우기가 아니라 정을 쌓고 세월을 쌓아가는 일이었던 겁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교정치료중인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밥은 맘껏 잘 먹니?”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에게 묻습니다. “오늘 밥은 맛있었니? 오늘은 누구랑 먹었어?”
학부모 모임이 있어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면, 걱정이 됩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밥을 혼자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밥만 맛있게, 즐겁게 잘 먹었어도 그 날 하루는 잘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혼밥이 유행이라 해도 급식시간에 혼자 밥 먹는다는 아이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밥 한 번 먹자”고 연락을 주시는 선배님들, 친구들. 우리가 먹는 건 밥이 아니라 정이라는 걸 알기에 그 말씀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식사하셨습니까? 대신에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은 누구랑 식사하셨습니까?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윤정 장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