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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Dentistry in Korea

대한치과의사학회 권 훈 이사, 이주연 부회장

대한민국 치의학 역사는 반만년의 역사만큼 세계 어떤 나라와 견주어도 절대 짧지 않고 콘텐츠 역시 풍부하다. 지면 관계상 모든 이야기를 언급할 수 없지만 치의학과 연관된 유적과 문헌 등을 통해 한국 치의학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과거 치의학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대한민국 치과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선사시대 (prehistory)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우문봉 남쪽 비탈에 위치한 검은 모루 동굴에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70만년 전 구석기로 추정되어, 남북한 통틀어 한국의 역사의 시작을 70만~100만년 전으로 올려놓았다.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75Km떨어진 평남 덕천시 승리산 동굴에서는 최초로 인골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화석의 아래층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어금니 2개와 어깨뼈 1개가, 위층에서는 35세로 추정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치아 2개가 박힌 하악골이 나왔다(그림1). 이 치아들은 한민족의 시원인 사람들의 생활상과 치아질환 및 치유의 흔적도 보여준다.


고조선 (古朝鮮, Gojoseon, ?~기원전 1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는 의약의 창시자와 의료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하늘의 신인 환인의 후계자 환웅은 바람과 비와 구름을 거느리고 세상에 머물며 곡식과 수명과 질병, 형벌과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다스렸다.’ 여기서 환웅은 절대자이며 의약의 창시자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견디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참을성 많은 곰만이 21일을 견뎌 여자가 되었다.’ 웅녀 탄생에 사용된 쑥과 마늘은 원시의약품이다. ‘웅녀가 환웅 과 결혼하여 아들은 낳으니 그가 곧 단군이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고조선 시대의 구강병 치료는 무당 또는 무의(巫醫)가 도맡아 하였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는 한민족 고유의 치과의술을 바탕으로 중국과 인도, 일본, 아라비아 등과 교류를 통해서 발달하였다.

고구려 (高句麗, Goguryeo, 기원전 37년~668년)

고구려의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장군이 지휘를 하는 작은 내성을 아성(牙城)이라고 한다(그림2). 아마도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어금니 아(牙)자가 사용된 것 같다. 장군의 깃발에 코끼리의 상아(象牙)가 꽂아 졌는데 이 상아 깃발은 아기(牙旗)라 하였고, 장군의 휘하에 있는 병사로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를 아병(牙兵)이라 하였다. ‘아성’이라는 명칭은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494년 고구려가 신라의 견아성(犬牙城, 현재의 문경)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百濟, Baekje, 기원전 18년~660년)

백제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 인골 유적의 중요한 공통점은 치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재위 501-523)에서는 오직 치아 한 개만이 수습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치아의 주인공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반면에 쌍릉에서는 인골 조각과 어금니 몇 개가 발굴되었고, 7세기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치아라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불교를 숭상한 무왕은 조개류와 채식 위주의 식사를 즐긴 것으로 판정되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왕릉이 있다.

신라 (新羅, Silla, 기원전 57년~935년)

신라시대 왕의 호칭 중 하나인 이사금(尼師今)의 어원은 떡을 베어 물어 남은 잇자국인 ‘이의금’이 많은 사람이다. 건강한 치아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덕과 힘을 갖춘 인물로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 있다. 신라 남쪽에는 가야(기원전 1세기-562)라는 국가가 있었다. 1985년에 경남 사천시 초기 가야시대 두개골에서는 송곳니를 인위적으로 뽑아 어떤 신분을 표시하거나 통과의례를 치른 흔적이 확인되었다(그림3).



고려 (高麗, Goryeo, 918년~1392년)

고려사(高麗史)에는 치아상해보상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여 치아 한 개가 파절되면 곤장 90대, 두 개 이상이면 곤장 100대의 형에 처한다’는 흥미로운 문구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치아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우식 와동에 송지(松脂)를 충전하는 법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에는 치통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종교적 치과치료법인 ‘불설주치경(佛說呪齒經)’이 새겨져 있다.   

조선 (朝鮮, Joseon, 1392년~1897년)

조선의 임금 세종(1397-1450)은 한국의 약제 처방전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했다. 또 지방에서 의녀(醫女)를 선발하여 서울에서 교육시킨 후 전국의 모든 부녀자들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제주에 사는 효덕이 이갈이를 고쳤다는 대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치통으로 고생하는 조선의 왕에 관한 기록도 여럿이고, 가씨(加氏), 장덕(張德), 귀금(貴金)등의 의녀도 여럿 언급하였다. 이들은 비록 천한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여성 전문직업인으로 활동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東醫寶鑑, 1610, 허준)은 치통을 7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그에 따른 병증과 치료법을 기록하고 있다(그림4). 하지만 충전법에 관한 설명이 없는데, 이전에 사용되었던 재료와 시술이 완전하지 못하여 도태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까지 치통을 차단할 목적으로 종이나 가죽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쓴 치과부적이 사용되었다(그림5). 고전소설 ‘배비장전’에는 기생이 사랑의 징표로 양반의 생니를 요구하는 내용이 묘사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굿이나 부적을 이용한 원시요법이나 특정한 징표로 인위적으로 발치한 풍습이 오랜 세월 동안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년~1910년)

개항(1876) 이후 미국과 일본을 통해 근대 치의학이 도입되었다. 제국의 초대황제 고종(1852-1919)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료를 도입하려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심하게 부상당한 왕비의 조카 민영익을 미국 선교의사 알렌(H. N. Allen)이 수술로 살려냈다. 그러자 고종은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민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개원(1885)하였다. 제중원에서 선교의사들이 구강병 치료도 하고, 한국인 의학생들에게 274개의 발치 교육(1901)을 한 것이 한국정부가 근대 치의학을 도입한 효시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치과의사는 1883년 인천에 개원 1년 만에 서울로 옮겨온 일본인 노다오오지(野田應治)였다. 단기간 출장 치료를 한 서양치과의사도 몇 있었다. 고종은 1903년 11월 소어스(James Souers)에게 앞니 보철치료를 받고서야 치과의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치과의사법을 제정하지는 못했다.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1905)하면서, 일본인 입치업자들이 대거 조선에 개업해 치과의사들과 마찰을 빚는 가운데 한국인 입치업자도 등장하게 되었다(1907).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Korea under Japanese rule, 1910년~1945년)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식민통치를 위한 치과 의료정책을 시행하였다. 치과의사법(1913.11.15.)은 공포했으나, 치의학교 설립이나 면허시험은 미뤘다. 반면 일본에서는 불법화된 입치영업을 한국에서는 허용했다(1913.12.11.). 따라서 한국에서 처음 설립된 치과의사단체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주도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는 쉐프리(W. J. Scheifley)를 과장으로 치과학 교실을 개설(1915)하여 치의학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그림6). 세브란스연합의학교장 에비슨(O. R. Avison)은 총독부에 치과의학교 설립은 신청(1921)했지만, 보류되었다. 대신 일본당국은 일본인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에게 ‘사립경성치과의학교의 설립 안’을 올리도록 하여, 이를 허가(1922)하였다(그림7).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석태(치과의사면허 제1호)였다(그림8). 일제 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여성 치과의사 최금봉(1896-1983)은 해방 후에는 여성 운동가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였다(그림9). 한편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를 결성하여 학술 및 구강보건활동을 했다. 한성치과의사회 회원들은 해방 이후 대한치과의사협회를 이끌어나가는 주역이 되었다.


해방이후 미군정 (1945년~1948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라는 전국적인 치과의사단체를 결성(1945.12.9.)하였다. 설립목적은 한국인의 구강보건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현재까지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기관지를 발행해왔다(그림10).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보건후생국 안에 독립된 치무과가 생겼고, 입치사는 한지치과의사로 승격되고, 경성치과전문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친미’와 ‘자치’, ‘의료기관의 국영화’를 주장하던 이들 간의 갈등이 있었고, 남북 분단이 공고해졌다.



대한민국 수립과 한국전쟁기 (1948년~1953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치과의사회는 대한치과의사회(이하 KDA)로 개명되었다(그림11). KDA는 치과의사의 직업적 위상과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의치일원화’운동과 ‘치과에서 구강과로의 명칭개정운동’을 벌렸으나, 국민과 의사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한국전쟁 당시 40세 이하의 치과의사들은 군대에 들어가 UN군 산하 의료진에게 항생제처방, 정맥주사 등의 실무훈련을 받고, 악안면성형 재건수술을 개척해 한국 성형의학 분야의 효시가 되었다.



전후복구와 아시아 태평양 국제회의 서울 개최
(1953년~1975년)

1959년 창설된 미8군 38선 치과의사회(38th Parallel Dental Society)는 한국 치과군의관들과의 학술적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 초창기 치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그림12). KDA는 무자격자의 치과시술을 단속하면서 치과대학을 6년제로 바꾸고 치의학 전문분과학회를 창립하여 치과 의료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KDA는 국제교류를 위해 WHO국제회의에도 참가하고, 제2차 아시아태평양치과회의(1958,이하 AFDF), 제47차 세계치과연맹(1959, 이하 FDI)에 가입하였다. 1967년 4월 서울에서 첫 국제회의인 제5차 아시아 태평양 치과회의가 개최되었다(그림13). 12개국에서 외국인 200여 명과 한국인 800여명이 참가한 큰 행사였다. 1967년 2월 보건사회부 치무과가 부활되었다. 정부는 국가적인 정책이나 예산 없이 치과의료 봉사를 독려하였으며 치무과는 1975년에 의정과로 흡수되었다. KDA는 1971년 치과의사윤리를 선포하였다. KDA 회관은 1960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1971년 영등포, 1994년 성동구 송정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 최단기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1977년~1989년)

1977년부터 저수가, 저급여, 저보험료를 기조로 치과 보철, 교정, 예방등을 제외한 의료보험이 시작되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국민들의 열망 속에 1989년 전 국민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확대되었다. KDA는 구강보건인력 적정수급과 정책개발을 위해 치정회(1989)를 창설하였다. 그 해 제14차 아시아태평양 총회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개최되었고(그림14), 지헌택이 차기 회장(1989-92)으로 선출되었다.

시민운동과 함께 한 구강보건사업법 (1990년대)

 1990년대 한국은 11개 치과대학(1992)에서 배출되는 치과의사 수도 증가하고, 설탕섭취율과  치과외래진료수도 증가했다. 임플란트가 대중화되고 전문치과의제도 시행이 확정되었다.  1997년 제85차 FDI 서울총회에는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 약 1만4천명, 해외 2천명의 치과인들이 참가하였다. 서울총회 조직위원장인 윤흥렬(21대 치협 회장)은 “금연”운동을 전개하였고, FDI 회장(2003-2005)이 되었다(그림15).



1997년은 남한은 국제금융(IMF) 지원을 받았고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고난을 겪었다. KDA는 북한동포를 위해 보건의료협력본부 결성하여 성금과 의약품, 비료 등을 북한으로 보냈다. 더불어 KDA는 치아우식증 예방을 위해 시민단체와 협력하여 일부 지방자치단체에 수돗물 불소농도조절 사업을 시행하였다. 또한 구강보건전담행정부서설립을 위해 대국민서명운동과 공청회등을 벌렸다. 그 결과 1997년 구강보건과가 설치되고, 2000년에는 구강보건법이 정비되었다.

치과의료보험의 보장성 강화 (2000년대)
 
2002년 제24차 APDF 서울 총회에서 이기택(23,24대 치협회장)은 차기 APDF 회장이 되고 구강보건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2007년 정부가 주도한 의료법 개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독립적인 구강보건행정부서가 해체되었다. 2009년부터 치석제거, 치아홈메우기, 노인틀니, 노인임플란트에 단계적으로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치료위주의 급여로 구강병을 줄이는데 한계가 있어, KDA는 예방 및 진단급여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KDA의 법, 윤리, 분쟁조정활동

KDA는 공익성과 전문가주의를 강화하고자 2006년 치과의료윤리헌장을 개정하고, 치과의료정책연구소(2008-)도 개설하였다. 한국의 의료법은 의료기관의 비영리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KDA는 의사가 아닌 ‘사무장병원’을 통해 지나친 영리를 추구하는 네트워크 치과가 늘어나자, 1의사 1의료기관 개설법(2012)을 강화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허위 및 과대 의료광고를 하지 않도록 의료광고사전심의제도를 재도입(2019)하였다. 치과와 의과간의 진료영역 분쟁에 있어서는, 2016년 7월 ‘치과의사의 눈가 주름 보톡스 시술은 적법하다’는 대법원의 판결(2016.7.)을 받았다. 현재 만성질환과 통증조절분야에서 의학 및 한의학과의 협력도 늘리고 있다. 의료분쟁에 대해서는 소비자보호단체, 의료분쟁조정중재원(2012), 공정거래위원회와 함께 분쟁조정업무를 하고 있다.

치의학 연구 및 기술산업의 발전

2000년대 한국은 치의학 교육과 연구, 산업 분야에서 국제 교류가 일상화되었다. 3차원 영상 디지털 장비와 캐드캠(CAD-CAM)장비 사용이 활발해지고, 바이오원천 기술 확보 및 실용화도 구축 중이다.  KDA는 4차 치과의료산업을 총괄할 한국치과의료융합산업연구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구강보건전담행정부서 부활을 통한 정책교류

김철수(30대, 2017-2020) 집행부는 구강보건전담부서부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019년 1월 8일자로 ‘구강정책과’를 부활시켰다. 현재 아동과 청소년 주치의제도, 장애인과 노인요양 보험, 전국민 구강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노력중이다. 특히 북한과의 평화로운 교류를 인내심을 지니고 확대해나갈 것이다. 세계 여러 국가들의 관심과 협력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