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흥 행 대 박

시론

지금 세대는 전쟁을 영화 ‘진주만’(2001)이나 덩케르크(2017), 인천상륙작전(2016)등을 통해 경험한다. 흥미를 자극하는 도입장면과 더불어, 복잡할 수도 있는 그 시대의 상황들을 적당히 생략하고 얼버무리는 대중영화기법은, 당시의 숨가쁜 상황들을 위험과 피해 없이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안전하게 당시의 위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적당히 가미된 로맨스와 기타 멋스러움도 즐기며, 앉아 즐기기 딱 좋은 오락으로 만들어주니 영화산업에서 끊임없이 작품이 나오는 인기장르다. 단, 포격과 총칼에 신체가 처참히 분리되는 전장을 같이하며 좀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전우가 더 이상 내 옆에 존재하지 않는 극한적 상황을 너무 시청각적으로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은 금물이다.

과도한 - 실제는 더 잔인하고 절망적인 전쟁이었었어도 - 표현은 소위 현재의 ‘문명화(civilized)’된 관객들의 외면과 수없이 많은 온라인 비전문비평가들로부터 날아오는, 전문가보다 더 충격적인 여론뭇매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섣불리 사실을 기록하고 진실을 전달하며 명작을 꿈꾸는 영화를 만들다가는 대박은커녕, 흥행참패에 출연배우, 감독, 제작자의 값어치까지 떨어지는 곤란함이 덤으로 안겨지므로, 절대로 그런 다큐멘터리성 요소가 넉넉한 모범영화를 만드는 길로‘흥행대박’을 기대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제는 대중들의 tolerance와 입맛을 잘 헤아린 영화를 만들면 명작이고 대박이다. 어차피 대중이 기호에 따라 소비하는 ‘product’임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마는 필자는 그런 부분이 못내 아쉽다.

이렇게 생각과 행동이 적당히 타협되어, 이익이 많이 남는 쪽으로 ‘적절한’ 완성에 성공한 ‘product’들을 우리는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런 조절에 여러 번 성공한 개인이나 기업은 경쟁력있고 유망하다고 평가받고, 그 보상으로 대중여론의 열광과 자본의 투자유입이라는 보상을 받으며, 또 다시 비슷한 기획에 몰두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대중적 성공은 동일하거나 모방된 아류의 기획물들 - 예컨대, 뉴타운개발이나 아이돌그룹, 종신보험 - 을 대량으로 쏟아내며, 시대적 참신함과 사회적 공공수익성이 예전같지 않음에도 재포장과 눈속임을 통해 반복적으로 시도된다. 무릇 생명력의 작동은 무상히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논리적인 피드백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일련의 과정일진대, 변화의 역동성이 있어도 긍정적 생존을 향한 가치와 의미의 확신이 없으면 제대로 된 생명력의 작동이라 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세대는 고상하고 존경받는 일을 하며 살아가라고 다음 세대에 가르치기도 쉽지 않다. 다음 세대에 ‘무엇을 하며 살던 그저 밥굶지 않고 살아남아, 다행히 짝이라도 만나 운좋게 다음 세대를 이어나가주기만 해도 고맙겠다’라는 당부를 하는 시대를 산다. 이것은 전쟁영화에서 전쟁이란 것이 인간집단의 광기가 제대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며, 얼마나 비인간적 극한상황인지에 대한 묘사나 메시지가 없어도, ‘그저 이번 작품 망하지 않고 관객이 되도록 많이 들어, 또 그런 수준의 영화를 하나 더 만들 수만이라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저 그런 영화는 볼 수 있겠지만, 수작이나 명작을 접하기는 어려운 길로 접어든다.

비유가 적절치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우리 치과계는 막연히 이런 느낌을 준다. 화려하고 세련된 영화처럼 관객 북적대는 최신 주제들에 밀려, 그것들의 기반을 제공했던 ‘전쟁의 참상과도 같은 절실한 내용’들의 전통 임상 주제들은 대박흥행을 위해 - 그렇다고 절대 버릴 수는 없는 내용이므로 - 잉여주변공간으로 재배치되어 저렴한 기획상품군으로 정리되어 갔다.

아울러,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와 같은, 1차 진료기관의 형태와 기능 역시 변형되고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지금 이러한 변화와 소실이 치과계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 또는 본질적 적응을 향한 생명력의 적절한 작동인가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지 않는 듯 하다.
우리 모두 ‘비록 내용이야 어떻든 흥행작들이 계속되길 바라기’때문은 아닐까. 그냥 시대와 정책이 권하고, 대중의 기호에 따라 제작되어 영화처럼 소비되는 product같은 Dentistry로 나아가자고 한다면, 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리라. 필자가 이야기하는 이 구름 잡는 듯한 얘기가 공동체 전체의 무관심은 아니겠지만, 공동체 전체의 관심은 아닌 듯하다.

우리들이 이루고 있는 치과계가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이고, 수많은 나뭇잎과 가지들로 이루어져 있는 풍경을 그리며, 언젠가 펼쳐보다 여러 번 읽었던‘예언자’한 구절을 써본다.

“나무 전체의 묵인 없이 나뭇잎 하나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 칼릴 지브란 -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호 서울 중구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