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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원 먹는 날

스펙트럼

어느덧 개원 12년차… 치과를 오래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요즘은 우리 치과의 전 구성원들이 업무를 수행하고 환자분들을 대함에 있어 일정한 경지에 이른 것인지 치과에서 큰 소리가 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개원부터 만 10년까지는 매년 적어도 한 두 번씩은 치과에서 환자분의 고성을 들었던 것 같다. 주로 데스크 쪽에서 뜬금없이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고성이 시작되면 반사적으로 고민이 함께 시작된다. 웬 고함소리일까? 잘못 들은 건가? 내가 나가봐야 하나? 내가 나가면 환자를 더 자극하는 건 아닐까? 직원은 안전한 건가…? 고민도 잠시, 고성이 한 두 번으로 진정되지 않으면 후다닥~ 그야말로 번개같이 달려 나가게 된다.

작년 매우 더웠던 어느 날, 직원들이 모처럼 수술실 기구대 위에 소독포를 펼치고 각종 멸균된 기구들을 나열하며 임플란트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환자 분께서도 도착하셨고, 그 동안 좀처럼 뵙기 어렵던 보험 임플란트 환자를 기분 좋게 보게 되는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데스크 쪽에서 난데없이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학습된 대로 번개같이 달려나간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한 실장과 환자분이었다. 당시 우리 실장은 15년차 위생사로, 이 때까지 함께 일한 위생사 중에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이었는데, 별로 잘못한 것도 없이 날벼락을 맞은 터라 어안이 벙벙할 상황에 최선의 응대를 하고 있었다. 상담 과정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던 기운 좋으신 어르신께서는 아직 바깥에서 받은 열기를 채 식히지 못하신 상태로 실장의 응대를 받고 계셨고, 그다지 동조하지 못하고 계신 모습이었다.

잠시 들어보니 어르신께서 치과에 들어오신 후에 실장이 임플란트 시술에 대해서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어르신께서 그것을 잘못 들으신 탓에 무언가가 변경되고 비용이 추가된다는 이야기로 오인하셔서 언쟁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진정이 좀 되시면 좋으련만… 실장이 설명하고, 해명하고, 경청하며 오해를 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어르신께서는 자기 분에 못 이겨 계속해서 격앙되어갈 뿐이었다. 급기야 여기서 임플란트 시술을 안 받으시겠다고, 전 처방 된 약값을 환불해달라고 요구하셨다. 약을 저희가 판매한 것도 아니고 무슨 약값을 환불해드려야 하나 싶고, 이렇게 하시는 와중에 어떻게 시술을 하겠나 싶어 이렇게 하시면 저희로서도 시술을 못 해드린다고 항변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약을 먹어서 몸에 해가 되었을 테니 변상 하라시는데, 저런 분인 줄 모르고 픽스쳐라도 한 개 심었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소파에 앉으셔서 영업을 못하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으시는데, 임플란트 예약을 잡느라 다른 환자 예약을 잡지 않았으니 치과 안에 환자가 한 명도 없어서 영업을 방해하실 수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예약을 비워 놓아 환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험악한 욕설을 하며 나가시는 어르신을 따라가 치과는 이러시는 곳 아니라고 다음부터 절대로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그 길로 약국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이런 날은 청심원을 먹는 날이다. 고성을 듣느라 상당한 시간 동안 심장이 벌렁거렸고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으려고 심한 감정노동을 하였으니 무엇으로든 상한 몸과 마음을 달래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엔 왜 다섯 개씩이나 청심원을 사는 지 의아해 하던 약사 선생님께서도 이제는 나를 통해 이러한 치과계의 사정을 전해 들으시고 안쓰러워하시며 청심원을 내어주신다.

청심원 봉지를 들고 치과로 돌아가는 길에 나부터 청심원을 하나 마시고 치과로 들어서 험악했던 공기를 환기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건내는 청심원을 마다하며 자기는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진료팀원들에게 그래도 마시라고, 지금 본인 심장 빨리 뛰는 거 본인만 모른다고 청심원을 거듭 권하였다. 전쟁의 최전방에 섰던 실장은 청심원을 받고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정신이 났는지 소독실 구석으로 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다. 화장이 번지도록….

청심원 먹는 날엔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불신, 의료인의 실추된 이미지, 불합리한 의료제도, 총체적으로 망가진 의료계… 운이 좀 없었다, 일이 좀 꼬였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감당한 비참한 감정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 같다. 환자와 의사 간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윤리와 의술, 의사소통 기술 등의 개인 역량으로 감당하기엔 치과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너무나 척박해진 것 같다.

치과의사가 진료실에서 환자한테 칼을 맞아도 뉴스에 한 줄 언급되지도 않는 세상이다. 청심원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감정의 요동은 애교인 수준이다. 의료환경이 더 악화되어 환자 분들이 의사들의 형편에 스스로 공감하실 때까지 애꿎은 청심원만 들이키고 있어야 하는가? 잃어버린 의료인 직군의 권위와 신뢰감을 되찾을 길은 정녕 없는가? 상실감과 무력감 속에 얼마나 더 노력하고 인내해야 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것 같은데….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곽재혁 좋은이웃치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