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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선처 바랍니다

스펙트럼

대학병원의 인턴들이 으레 그러하듯 저 역시 신환을 주로 접합니다. 신환의 종류를 크게 둘로 나누자면, 아무 정보 없이 대학병원을 찾아온 경우와 타 기관에서 의뢰되어 온 경우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환자의 주소는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의뢰되어 온 환자의 대부분은 대학병원에 이르기까지의 험로를 주소와 연관 지어 장황하게 늘어놓기 마련입니다. 의료전달체계에 관심이 많은 제게 상급 기관으로 환자가 의뢰된 배경을 유추하는 일은 꽤 흥미로운 것이지만, 유닛체어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하소연을 쏟아내는 환자에게서 명백한 주소를 찾아내지 못할 때면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제 능력으로 환자의 주소가 쉽게 파악되지 않을 때 환자가 들고 온 진료의뢰서는 큰 도움이 됩니다. 숙련된 개원의가 관찰한 임상 및 방사선학적 소견이, 저같이 미숙한 치과의사에게 등대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지요.
 

진료 중 벌어진 우발적인 사고와 관련하여 내원한 환자가 들고 온 의뢰서의 쓰임은 더욱 요긴합니다. 이 경우 환자는 대개 화가 나 있는데, 의뢰서에 적힌 주소를 빨리 파악하고 적절한 조처를 한다면 환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발적 사고임에도 의뢰서 한 장 없이 내원하는 환자가 간혹 있습니다. 이런 환자는 사고가 벌어진 의료기관의 설명마저 불신하여 이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건네곤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보통 우발적 사고를 치과의사의 과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도가 깔립니다.

의뢰서가 없어 경위를 전혀 모르는 채 그러한 질문을 마주하면, 해당 사고가 피치 못할 것이었음을 설명하기가 궁색해집니다. 대신에, ‘글쎄요, 그 선생님이 왜 그러셨을까요.’와 같이 두루뭉술한 답변을 내놓게 됩니다. 환자의 의도에 다소 힘을 실어 주는 대답인 줄을 알면서도, 미천한 제 실력으로는 더 나은 답변을 건넬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정성 들여 의뢰서를 작성해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계절에 알맞은 인사말을 잊지 않고 적으시는 선생님부터 겸손한 자세로 설명과 함께 부탁 말씀을 전하시는 원장님의 의뢰서를 보고 있자면, 제가 이런 분들과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뿌듯해집니다. 그 의뢰서를 가져온 환자가 진상에 가까울지라도 살갑게 대하려 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고진선처 바랍니다.

의뢰서의 말미에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문장입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진’의 뜻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고명한 진료’라고 해석할 것인지, ‘고생을 다해서’라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나뉩니다. 저는 아직 ‘고명한 진료’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지라, ‘고생이라도 다해서’ 신환을 마주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타과로 의뢰할 때에는, ‘고명한 진료로 고생을 다하시더라도 선처를 바라는’ 마음으로 의뢰서를 작성해야겠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승현
강릉원주대 예방치의학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