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빨래/콩트2

여름날 늦은 오후, 온종일 찜통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바람이라도 쐬어 볼까 하고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 뒤편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주택들의 옥상에는 형형색색의 빨래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3층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주택의 옥상에 한 여학생이 빨래를 걷으러 올라왔다. 그녀가 입은 파란색 스커트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이후로 나는 자주 그녀가 사는 집의 옥상을 내려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은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 옥상에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애써 떨쳐보려고 교회학교 선생님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목욕하던 밧세바를 보았던 다윗왕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다윗이 있어야 할 암몬과의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혼자 예루살렘 궁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건 훔쳐보는 거라고,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마음먹을수록 나의 시선은 옥상에 긴 시간 동안 머물곤 했다.
 

 여름 장마로 며칠째 그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어느 날, 아침에 민망한 일이 생겼다. 속옷이 축축하고 끈적한 뭔가로 젖어서 입고 있기도 벗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간밤에 꾸었던 꿈이 원인이었다. 꿈속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옥상을 드나들던 소녀와 열렬한 키스를 했었다. 같이 방을 쓰던 사촌은 새벽에 오줌마려운 강아지처럼 형이 옆에서 끙끙대서 잠을 설쳤다고 투덜댔다.
 
 가을이 되었다. 그녀가 앞서 걸어가는 등굣길을 나는 수도 없이 자전거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자전거 속도를 늦추거나 다가가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했다.

풀벌레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졌다.

 대입 시험을 치르기 1주일 전 나는 심한 독감에 앓아누웠다. 추워진 날씨 탓에 그녀는 더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는 모든 짐을 꾸려서 용달차에 싣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아무 말이 없으셨다. 눈이 내리며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간혹 그녀가 살던 주택 담벼락을 따라 피어난 노란 산수유가 꿈속에 나타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