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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얼굴<1>/소설

그것은 실로 특이한 식물이었다. 독특한 문양을 가진 자갈돌을 촘촘히 박아놓은 것 같기도 했고 탈피를 앞둔 갑각류가 납작하게 엎드린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듯도 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 식물에 대해 꽤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던 A였기에 이 낯선 식물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았다. A는 화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그 식물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매끈했다.

 

“그거 화분 말이야, 진짜 예쁘지 않아?”

 

B가 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A에게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화분이 예쁘다는 뜻인지, 이 독특한 식물이 예쁘다는 뜻인지, A는 헷갈렸다. B는 거울을보며 선물로 받았다는 새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끼우고 있는 중이었다. B는귓불이 약해서 새로운 귀걸이로 갈아 낄 때마다 상처가 나곤 했다.

 

“응, 예쁘다. 그런데 이건 다육식물인가? 이름이 뭐야?”


“뭐라더라? 저기 파일에 보면 사진이랑 이름 있어. 한번 봐봐.”

 

B는 익숙하게 화장 솜으로 귓불을 꾹 누르며 책상 위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B는 시내의 이름난 꽃집에서 매주 ‘그린 인테리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요즘 강남의 젊은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실내 조경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직접 화분을 만들거나 간단한 분갈이 하는 법 등을 실습해보는 수업이었다. 지난주에는 고급스러운 대형 선인장을 가지고 왔었다.A는 B의 수업 자료가 들어 있는 파일을 뒤적였다. 이 독특한 외관을 한식물의 이름은 ‘Lithops(리톱스)’. 어원은 그리스어 ‘lithos(돌)’와 ‘ops(얼굴)’를합친 것이라 했다. 원산지는 남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 지난 몇 년간 한정된 영역의 공부만을 해 온 A로서는 물론 처음 들어보는 나라 이름이었다.

 

“이거 ‘리톱스’라는 식물이래.”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어. 좀 있으면 꽃도 핀대. 인터넷에 검색해봐. 꽤 예쁘게 생겼어.”


B는 여전히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B는 초등학교 4학년 때 A가 살던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A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큰 포크레인이 마을 어귀에 있던 빈집을 허물고 있었다. 예전에 김씨네가 살던 집에 도시에서 일가족이 이사를 온다고, 원래 있던 집을 허물고 2층 양옥집을 짓는 것 같다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A는 매일 하교 길에 한참을 서성이며 그 집을 구경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옥외 계단이 생기던 날 A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A는 2층 교실로 올라가는 학교 계단 외에는 제대로 된 계단을 밟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층 발코니 와 넓은 창문, 붉은 지붕과 벽돌, 작은 연못, 마당을 가득 매우고 있는 돌멩이와 잔디, 어디선가에서 베어온 나무들…… 그리고 거의 마지막으로 담장이 둘러쳐졌다. A는 더 이상 그 집을 구경하지 않았다.

 

그다음 주에 B가 전학을 왔다. 한 학년에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이 다녔던 그 시골 초등학교에 전학생이 온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누가 전학을 왔다는 소문에 온 학교가 시끌벅적했다. 전학생이 4학년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5학년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복도 끝에 있는 교무실 문이 열리고 4학년 담임선생님이 바로 옆에 전학생을 데리고 나오자, 창문 밖으로 훔쳐 보던 5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아쉬움 섞인 탄식을 쏟아냈다.

B는 키가 크고 새하얀 얼굴에 눈이 큰 여자아이였다. 새로 지은 2층집에 이사를 왔다고 소개하자, 교실 안의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담임선생님이 B에게 반장인 A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A는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B는 소탈하고 명랑한 소녀였다.

 

시골 아이들이 더 순수하고 밝을 거라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렸다고 A는 처음으로 느꼈다. 김 씨 아저씨가 작년에 왜 목을 맸는지, 김 씨 아저씨네 부인은 왜 집을 나갔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없었다. 시골 어른들은 도무지 말조심하는 법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불을 꺼버린 방안에서 시골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어른들이 숙덕거리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시골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음울한 감정 덩어리를 지니고 살았다. A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 A가 시험에 또다시 낙방하고 고시원에서 방을 빼야만 했을 때-잠깐 내려갔던 고향에서 우연히 B와 마주쳤다. B의 부모님은 건강상의 문제로 시골을 떠나 다시 도시로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살라는 주치의의 권고가 있었다고 했다. B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한두 달에 한 번씩 비어 있는 시골집에 내려와 집안 정리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집 관리가 제법 만만치 않아 사람을 써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예전에 A가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어왔다.

 

A는 벌써 시험에 몇 번 떨어졌는지 모른다며 씁쓸하지만 제법 솔직한 웃음을 내보였다. 이제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로 버티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을 때, B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내가 살던 서울 오피스텔을 거의 1년간 비워둬야 하는데, 너 거기서 살래? 전세라서 관리비만 내면 되는데.”

B는 곧 결혼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금은 원래 살던 오피스텔을 거의 비워둔 채, 예비 남편과 신혼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데 오피스텔 계약 조건이 까다로워 그냥 1년 뒤에 전세금을 받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대신에 네가- 한두 달에 한 번씩만 여기 우리 집 청소를 해 주면 어떠니? 너는 그래도 여기에 부모님 뵈러 가끔씩은 올 거잖아.”

 

A는 그날 바로 B의 집으로 함께 가 청소하는 방법을 배웠다. 가장 힘들다는 마당의 잡초 관리부터 각종 고지서를 처리하는 방법까지, B는 마치 준비라도 해 둔 듯 세련되고 자연스러웠다. 바로 다음 날, A는 친구에게 맡겨 두었던 큰 캐리어 두 개를 끌고 B의 오피스텔로 갔다.

 

“관리비만 잘 내주고 편하게 살아.”

 

오피스텔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마친 B는 날렵하게 핸드백을 집어 들며 구두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A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가끔씩 올 수도 있어.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미리 연락하고 올게.”

 

A는 며칠 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 오피스텔 1층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A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적은 편이라 꺼리는 편이었지만 이동 시간이나 노동 강도를 생각했을 때 이만한 아르바이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데 점장이 혹시 1주일에 하루 정도 야간에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A가 이 건물에 살고 있어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도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대답을 하자, 점장의 얼굴에는 반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A는 점장의 반가워하는 표정 속에 감춰진 의아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살면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A는 오피스텔로 올라와 편의점에서 받아 온 폐기 도시락을 먹었다. 원목식탁에 앉아 진열 기간이 끝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사람이 확실히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A는 생각했다. B의 오피스텔에는 식기류가 하나도 없었다. 냄비, 그릇은커녕 숟가락 하나도 없었다. 집에서 음식을 일절 해 먹지 않았거나, 이미 신혼집으로 다 옮겼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A는 고향집에서 음식을 해 먹을 도구를 좀 챙겨올까도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A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편의점 도시락을 주로 먹었다. 남는 시간에는 오피스텔 창가에 앉아 그냥 멍하니 있었다. A가 가져온 캐리어 속에는 꽤 다양한 종류의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A는 몇 해 전부터 시험 교재가 아닌 다른 책을 읽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상했다. 소설책을 끼고 학창시절을 보낸 그녀였지만, 더 이상 글을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이걸 읽을 시간에 교재를 한 자 더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책 읽기는 A에게 공부를 할 체력을 고갈시키는 행위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