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작은얼굴<2>/소설

B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A가 이사를 온 지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A는 편의점에서 재고 정리를 하던 중이라 B가 보낸 스마트폰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일을 끝내고 확인했더니 오후 5시쯤에 잠깐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돌아갈 거라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오후 4시를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A는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오피스텔로 올라와 방 정리를 했다. 그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캐리어에서 책들을 꺼내 대충 비어 있는 책장에 꽂았다. 냉장고에 보관 중이었던 편의점 도시락도 모두 꺼내 버렸다. B는 오후 5시 반쯤, 부스럭거리는 큰 비닐 봉투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A가 문을 열었더니 B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니? 에어콘 좀 틀고 있지 그랬어.”
B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금 막 들어온 참이거든.”

 

“너 아르바이트 하는구나. 어디서?”

 

“여기, 바로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 거기? 일하기 편하긴 하겠다. 그런데 거기 은근히 손님이 많아. 바로 앞에 흡연 부스가 있어서 그런가.”

 

그건 B의 말이 맞다고, A는 생각했다. 유난히 담배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이건 아르바이트생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담배 재고 관리는 항상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 갑이라도 분실하면 한 시간 시급이 그냥 날아가고 만다. 거기다 담배를 사가는 손님은 진상도 많았다. 예전 경험까지 합치면, 판매하려고 진열 중인 라이터를 한 번만 쓰자고 조른 손님들이 스무 명은 넘을 것 같다.

 

“나, 아마 목요일마다 여기에 잠깐 들를 것 같아. 여기 바로 근처 꽃집에서 ‘그린 인테리어’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수업할 때마다 화분이 1개씩 생기거든. 그런데 우리 집까지 가져가기엔 너무 무겁고 멀어서 일단 여기에 두려고.”

 

B는 비닐봉투에 들어 있던 화분을 꺼냈다. 화려한 꽃잎을 가진 다육식물이었다. 분갈이가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 B는 말했다. 그 화분을 창가에 올려두자 제법 멋진 느낌이 들었다.

 

“너 기억나니? 우리 엄마가 정원 꾸미는 거 되게 좋아하셨는데.”
B가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화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기억나지. 너희 집 마당에는 항상 꽃나무도 많고 화분도 많고……. ”

 

“응, 그런데 지금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거의 누워만 지내셔. 나중에 시골집에 가서 당신이 가꾸던 정원이 엉망이 된 걸 보면 기분이 안 좋으실 거야. 그런데 어쩔 수 없을 거 같아. 정원 일을 한 번 배워볼까 싶어서 이런 수업도 신청했는데 그다지 흥미가 안 생겨, 나는.”

 

B가 전학 온 며칠 뒤에 B의 어머니가 반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했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A는 꽃나무 구경을 했다. A의 집 뒷산에 수많은 나무가 있었지만, B의 집에는 온통 처음 보는 나무들뿐이었다. B의 어머니가 빵과 쿠키를 만들어 주셨다. A는 집에서도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B의 어머니가 후식으로 사과와 배를 깎아서 가지고 나왔을 때, 둥글게 둘러앉은 친구들이 일제히 작은 포크로 과일을 꾹 누르던 그 장면을 A는 꽤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B는 그녀가 이야기했던 대로, 목요일마다 오피스텔에 왔다. 한 손에는 화분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초인종을 눌렀다. 때로는 과자, 맥주 따위를 사서 오기도 했다. B가 가져온 화분들 중에서 A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단연코 리톱스였다. A는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에 리톱스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리톱스는 자갈돌과 비슷한 빛깔과 외형 덕분에, 먹을 것이 부족하고 건조한 아프리카의 사막지대에서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언뜻 보면 납작하고 작아 보이지만, 영리하게도 흙 속에 대부분의 몸집을 숨겨 놓고 있다. 이렇게 동물들의 험악한 이빨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들의 조상이 있었기에 마침내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씨앗을 터뜨릴 수 있게 되었으리라.

 

리톱스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식물과는 확연하게 다른 성장 과정을 거친다. 싹을 틔운 어린 리톱스는 점차 몸집을 키우다가 탈피를 한다. 탈피란 기존의 둥근 잎(구엽) 사이에서 새로운 잎(신엽)이 돋아 나와 성장하고 결국에 구엽이 말라서 몸체에서 탈락하게 되는 과정이다. 탈피가 완료되면 여름에 3개월 정도의 휴면기를 가지다가 9월경에 다시 활발하게 성장한다. 이 시기에 리톱스의 몸체는 팽팽해지고 빛깔도 더욱 알록달록해진다.

 

또한 이 시기는 개화기이기도 하다. 만약 1주일간의 개화 기간 동안 수정이 되면 씨방을 채취해 씨앗을 얻을 수도 있다.

 

A는 둥글둥글한 리톱스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연두색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꽃을 피우려는 것이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이 9월이었다. 강사가 일부러 며칠 내로 꽃을 피울 수 있는 식물체를 수강생들에게 나누어 준 것일 거라고 A는 추측했다. 식물을 막 키우기 시작한 수강생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달콤한 동기부여는 없을 것이다. 파종부터 성장, 탈피, 휴면기를 모조리 뛰어넘고 꽃부터 본다는 게 A는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정기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인내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계속 결실을 당겨온다. 인내는 누군가의 시간을 빌려서 통째로 맡겨버릴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힘없는 자들이 누군가를 대신해서 인내하는 동안, 결실을 팔아 이득을 챙긴 자들은 또 어디선가에서 또 다른 결실을 당겨 온다.

 

리톱스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의 주말, A는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원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외에는 거의 가지 않았지만, B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6주에 한 번 정도 고향에 내려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별다른 말-이를테면, B의 집을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 않았던 터라, A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B의 집으로 갔다.

 

B에게서 받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선 순간, A는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단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무도 밟지 않는 시골 마당의 잡초는 무덥고 습한 여름을 거치면서 엄청난 속도로 자라 올라 있었다. 다 뽑으려면 서너 시간은 걸릴 것이다. 부모님께 대충 사정을 이야기하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여 신발장에 장화가 있나 뒤져보고 있는데 마침 어머니가 오셨다.

 

“시방 뭐 하능겨?”
A는 어머니에게 사정이 있어서 B의 집을 대신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대가로 그녀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머니의 심정이 당연히 이해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두는 건데, A는 후회했다.


 “그 집 여편네도 희한하더니, 딸내미는 한술 더 뜨네.”
어머니는 신발장에서 논일할 때 신던 오래된 장화를 꺼내며 독설을 내뱉었다.

 

“그 집 여편네가 정신이 오락가락혀서 요양병원에 입원했자녀. 갸도 지 애미가 치매에 걸린 바람에 파혼당했고. 애비는 진즉에 새 장가갔고.”
어머니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오래된 장화를 툭툭 털었다.

 

“보니까 갸가 그 집을 팔려고 내놓은 모양이던디, 것두 쉽지 않을겨. 재수 없는 집이라고 온 동네에 소문났지. 김씨네 부부 그렇게 되고 도회지에서 이사 온 그 집도 남편이 젊은 여자랑 바람나고 여편네 치매 걸리고. 쯧쯧, 하도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니깨 이제 여기 안 올라고 니한테 그런 부탁을 한 모양이네.”

 

A는 B의 집에서 약 5시간 동안 청소(라고 해봐야 잡초 뽑기가 대부분이었지만)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갔더니 아버지가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다. A는 늘 그랬듯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역정을 내었다. 니가 뭐해 준 게 있다고, 돈 한 푼 안 내놓은 주제에 잔소리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그 화살은 A에게도 돌아왔다. 다음 날, 어머니는 허튼짓 하지 말고 서울 올라가서 공부나 하라며 B가 준 양옥집 열쇠를 내놓으라고 했다. 합격하거나 취직하기 전에는 내려올 생각도 하지 마라,

어머니는 터미널에서 이 말을 남기고 촘촘한 걸음으로 돌아섰다. A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편의점으로 출근했다. 일요일 저녁은 손님이 별로 없는 날이다. 리톱스는 무사히 꽃을 피웠을까. A는 직원용 의자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점장이 매장을 잠깐 방문했다. 그는 ‘저기, 손님이 없을 때는 책 정도는 가져와서 봐도 된다’고 간단히 말하고 다시 돌아 나갔다.

 

아마 어디선가에서 CCTV로 지켜보다가 멍하니 앉아만 있는 A가 마음에 걸려서 온 모양이었다. 취직해라, 공부해라, 책 읽어라, 각각 다른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라고 A를 다그치고 있었다. A는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피곤에 지쳐 곧바로 침대 위에 늘어진 A의 눈에 창가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노란 이파리가 눈에 띄었다.

 

리톱스는 해가 있는 낮에는 꽃잎을 한껏 오므렸다가 늦은 오후부터 야간에 꽃잎을 완전히 펼친다. 지금은 오므린 상태지만, 오후가 되면 완전히 개화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A는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A의 예상대로 그날 오후, 리톱스는 마침내 노란 꽃잎을 활짝 펼쳤다. 영락없이 시골 마당의 자갈돌 사이에 핀 민들레꽃을 보는 것 같았다.
         
A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장을 스마트폰 메신저의 프로필 화면으로 저장했다.

 

그 주 목요일에 오피스텔을 방문한 B는 꽃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 어머니에게 꽃 사진을 보내드려야겠다며 수차례 사진을 찍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꽃집의 강사에게 인공 수정을 부탁해야겠다며 화분을 가지고 나갔다.

 

A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수박 꽃의 인공 수정을 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인공 수정이라고 해봐야 붓으로 살살 문지르는 게 전부로 보였다. A는 자기도 해 보고 싶다고 아버지를 졸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실망한 A에게 어머니는 집 마당 옆에서 아무렇게나 키우는 수박 꽃에다 한번 해보라며 붓을 주었다. 2-3일이 지나자, 그 수박 덩굴에서도 수정이 성공적으로 된 듯, 수박이 탐스럽게 자라 올랐다.

 

A는 기뻐서 아버지에게 자랑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한 인공 수정이 성공한 게 아니라, 근처에 날아다니는 꿀벌에 의해서 자연 수정이 된 거라고 면박을 주었다. 실망한 A는 수박에게서 관심을 아예 거두었다. 순지르기라도 계속해 주었다면 제법 큰 수박을 수확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이후로는 그 수박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A가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외출했던 B가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침 강사가 다음 수업에 들어가 오늘은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B는 꽃집에 왔다 갔다 하는 통에 남편이 올 시간이 다 되었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A는 자신이 붓을 사다가 직접 인공 수정을 시도  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