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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얼굴<3> 완결 /소설

세상의 모든 꽃들이 다 결실을 맺을 필요는 없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비숙련자가 - 비록 식물이라고는 하나 종자를 남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거창한 다른 개체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는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인공 수정에 실패하면 리톱스 화분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될까. 아버지의 무심한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A는 그 파동에 자신이 쨍하니 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열심히 노란 꽃술에 붓질하던 자신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A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자신의 딸을 데리러 왔던 B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운동회 날, A의 어머니는 멀찍이서 양산을 쓰고 서 있던 B의 어머니에게 여기 와서 같이 앉자고 말했다. A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B의 어머니가 다가오자 좀 더 구석으로 당겨 앉았다.

 

B의 어머니는 눈인사를 하며 돗자리에 앉았고 A의 어머니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새 보니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던데 고추 농사도 짓는지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A의 어머니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B가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누군가 달려가 B를 안아 일으켰더니, B의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체육 선생님이 B를 업고 양호실로 달려가는 동안, B의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교무실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B의 아버지가 회색 승용차를 끌고 나타났다. B의 어머니가 달려와 뒷좌석 문을 열자, 체육 선생님이 B를 조심스럽게 승용차에 태웠다. B의 아버지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단지 핸들을 잡고 뒤로 돌아보며 체육 선생님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A는 B의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했다. 뒤돌아본 B의 아버지의 얼굴은 틀림없이 운전석 등받이나 체육 선생님의 뒷모습에 가렸을 것이다. A는 B의 아버지의 승용차가 사라진 후에도 하얀 달리기 트랙 위에 새겨진 타이어 자국을 보면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이후에도 A는 B의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데 더 이상 마주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 B는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등교했다. 병원에서 가벼운 일사병이라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리톱스의 개화 기간은 약 1주일이다. 노란 꽃잎은 날마다 절정에 치달았지만, 결국은 바스라질 운명이었다. 씨를 남기면 아쉬움이 덜할까, 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럴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이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 며칠 뒤 흙 위로 자신의 몸을 떨구게 될 처지였다.

 

그다음 주에 B가 오피스텔을 찾았을 때는 이미 꽃잎이 조용히 말라가는 중이었다. B는 아쉬워하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너는 집에서 밥도 안 해 먹니? 여전히 아무것도 없네?”

 

“고시원 살 때부터 그냥 밖에서 간단히 사 먹거나 도시락 먹는 게 더 편해서. 사실 음식도 잘할 줄 모르고.”

 

“그래도 그렇지.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너는? 집에 요리 도구 하나 없던데?”
                                                                                          

“아, 신혼집으로 다 챙겨갔지. 난 요리 하는 거 좋아하거든. 엄마랑 그거 하나 닮았어. 우리 남친……이 아니지, 남편도 내가 한 음식을 좋아하고.”            

 

B는 이어서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A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같이 마트에 갈래? 내가 밥 해 줄게. 너도 조리 도구 몇 개만 사. 오늘 남편이 시댁에 내려가서 주말까지 있다가 올 거거든. 그래서 일찍 안 들어가도 돼.”

 

왜 B는 남편과 함께 시댁에 내려가지 않았을까, A는 의문이 들었지만 재빨리 생각을 멈추고 B를 따라나섰다. B는 자신이 오랫동안 단골로 다녔다는 그 마트에서, A가 부담을 가지지 않을만한 실용적이고 저렴한 조리 도구 몇 가지를 골라 주었다. 그리고는 삼계탕을 해 주겠다며 자신의 바구니에도 재료를 가득 담았다.

 

A는 그런 거창한 요리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B는 자기를 믿어보라며 웃었다.

 

요리에 자신이 있다는 B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차갑게 식어 있던 부엌에 온기가 돈 지 한 시간 만에 B는 마늘과 알밤, 대추가 소담스럽게 올려진 삼계탕 두 그릇을 원목 식탁 위에 내어놓았다.

 

A가 감탄하는 사이, B는 스마트폰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삼계탕을 먹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가끔 아빠가 집에 오시면 엄마가 삼계탕을 만들어 주셨거든. 그래서 난 삼계탕이 참 싫었어. 그런데 남편이 삼계탕을 좋아해서 요전에 한 번 만들어 봤었는데 맛있더라. 물론 먹을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서 재수 없지만.”

 

 A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B는 이어서 말했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충격을 받으셨는지, 2년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셨어. 그러자 갑자기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기 시작하셨어. 우리는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무리해서 살림을 합치고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갔어. 하지만 결국 지금까지도 승낙을 받지 못하고 있어. 난 이제 사실 좀 지쳤거든. 그래서 오늘은 남편 혼자 보냈어.”

 

A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B를 바라보았다.

 

“지난주에 리톱스 꽃 핀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드렸는데 아무런 감정도 없으신가 봐 이젠.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면 지난주에 그 꽃인지 알아보실까?”

 

A는 B에게 아무 말 없이 화장지를 건넸다.

 

“우리 엄마가 너 좋아했던 거 알아? 네가 반장이고 공부도 잘한다고, 전학 간 첫날 선생님한테서 들었나 봐.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했었는데……. 물론 넌 기억 안 나겠지만.”

 

며칠 뒤에, A는 B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B는 명랑한 목소리로 드디어 예비 시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얼마 전에 혼자 본가에 내려갔던 남편이 도대체 부모님께 무슨 말을 했기에 갑자기 승낙하신 걸까, B는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 준비로 본격적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더 이상 ‘그린 인테리어’ 수업을 듣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며 잘 지내고 있으라는 인사를 해왔다.

 

A는 여전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손님이 없는 시간에 조금씩 책을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으니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A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도 가고 취업 설명회도 다녔다.

 

A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험을 포기하고, 다른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본인 스스로 내린 중대 결정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리톱스의 꽃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흙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거무스레한 덩어리가 예전의 화려한 꽃잎이었다는 사실을 A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 추측도, A가 그 꽃을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A는 창가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은 리톱스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은 겨울이 되면 리톱스는 새로운 잎을 키운다. 기존의 잎 사이 갈라진 틈에서 새싹이 돋아나, 기존의 잎에서 영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며 자란다고 했다.

 

내년 봄이 되어 탈피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지금 A가 보고 있는 리톱스 잎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었다.

 

슬슬 시험이 다가왔다. A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아예 그만두었다. 점장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가끔 놀러 와서 도시락이나 가져가라고 했다. A는 본격적으로 독서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A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휴대폰을 보니 B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너 공부하는데 바쁠 것 같아서 그냥 집에 들렀다 가. 반찬도 좀 가져왔어. 책상 위에 청첩장 두고 갈게. 네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아, 남아 있던 내 짐도 챙겨서 간다. 화분들도……. 그동안 잘 관리해줘서 고마워. 너도 곧 좋은 소식 전해주길.’

 

A는 그녀의 문자메시지가 조금은 서운했다.

 

그날 밤 A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갔다. 화분이 놓여 있던 창가가 휑하니 달빛만 밝았다. 뒤돌아선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B의 청첩장과 리톱스 화분을 발견했다. A는 화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리톱스를 만져 보았다. 차갑고 매끈했다. 곧 탈피를 하고 긴 휴면기를 거쳐서 또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이번에는 씨앗을 거둬서 파종을 시켜볼까, B의 어머니의 병실에 어린 리톱스를 가져가면 좋아하실지도 모른다. A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