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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Relay Essay 제2372번째

나는 은행나무다.


내 나이가 1억 8000만 년이나 된다. 그러니까 모든 나무의 형님이 되는 꼴이다. 나는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생대 쥐라기 때부터 살았으니 말이다.


나는 홀로는 못산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향교 뒤뜰이나, 사찰 앞마당이나, 도심의 가로수나, 동구밖 정자 옆에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부부로 함께 산다. 암나무와 수나무로 부부이다.


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과 상쾌함을 주고 집안의 빈대도 없애준다. 또 심장이 나쁘거나 피가 잘 안 도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징코민이라는 약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한다. 나의 열매인 은행은 굶주린 백성들을 긍휼하는 구황작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뭇 선남선녀들의 낭만과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덕수궁 돌담길, 삼청동길, 정동길, 신사동 가로수길, 영주 부석사, 홍천 은행나무 숲,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 전주 향교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등 명소가 전국 곳곳에 있어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몸의 치유를 주고 있다. 이렇게 난 나의 낙엽까지도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무슨 구린내가 난다느니 독성이 있다느니 하면서 구박 아닌 구박을 한다. 더더욱 내가 참기 힘든 말이 있다.


“가을은 단풍(丹楓)의 계절이야.”


“온 산이 붉게 물들고 있다.”


“모든 가을 산이 천자만홍(千紫萬紅)이다.”


마치 가을의 상징이 붉은 단풍인 듯하다. 사실 가을 산의 색깔은 붉은색이 아니다. 붉은색을 띠는 나무는 단풍나무, 옻나무 정도이다. 벚나무가 처음에 붉은색을 띠나 곧 노랑 및 갈색으로 변한다. 산 대다수 나무 즉 자작나무, 낙엽송,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오리나무, 싸리나무, 아카시아 등등 모든 나무가 처음에는 노란빛이었다가 갈색이나 흑갈색으로 변해 나뭇잎으로 떨어진다.


대다수 나무의 낙엽색은 나를 닮아 노란빛이 기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을의 나무색이 붉다 하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는 단풍이라는 나무가 분명 가을 색의 주인인 은행나무 나를 밀치고 자기가 주인이 된 것이다.


이는 잘 못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람 세계에도 일어나는 듯하다. 엉뚱한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며 정작 주인은 주인 노릇을 못 하고 옆자리로 밀려나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게 단풍나무의 잘못인가? 은행나무의 모자람인가? 아니면 인간사 세상살이의 잘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