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마지막

스펙트럼

미국우주항공국은 지름 1km 정도의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어 미국 동부시간 21일 오후 9시 45분 지구 궤도에 접근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언론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소행성이 충돌할 경우 지구를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6500~6600만 년 전 지름 10km의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되었을 것이었다고 보도하면서 독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찾아보면, 소행성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은 하나의 가설일 뿐 아니라, 이 소행성은 가장 근접하였을 지구와의 거리가 620만 km 정도로 지구와 달의 거리의 16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만,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의 행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소행성이 정말 지구와 충돌한다면, 더 정확하게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마지막”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겠으나, 죽음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 개인차는 있겠지만 몹시 힘든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믿는 종교에서는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편안하게 마지막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을 비교해본다면, “마지막”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명확하게 시작과 끝이 있지만, 사회생활에서 시작과 끝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틀을 늘이고 줄여본다면 사회생활의 시작과 끝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시간이라는 선 상에서 살기 때문에 언제가 마지막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는 그 불확실성에 대해서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생활이란 단순히 시험보고 점수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 시간의 굴레안에 있기 때문에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공간처럼 돌아다닐 수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그것을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이라는 것의 중요함이 강조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학창시절의 끝, 연애의 끝, 어떠한 임기의 마지막, 은퇴 등 마지막에 대해서 논할 거리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시험의 끝은 결과에 따라서 운명이 좌우할 수 있겠지만, 징계의 끝은 달콤할 것입니다. 연애의 끝은 대부분은 쓰라린 기억입니다. 전성기의 끝은 힘들 수 있지만, 더 큰 다음 전성기를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대한 충고들로는 초연하게 끝까지 달려야 한다가 될 수도 있겠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끝에 와 있는 우리 사회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구령을 붙이지 말아야 하는 PT 체조에서 자꾸 마지막 구령이 어디선가 나오는 듯한 모습이 인간이 보여주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없는 시작과 끝을 경험하며 마지막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시간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시작과 끝도 있을 것이고, 알지 못하는 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달아지는 것도 있을 것이며, 영영 알지 못하는 상태로 지나가 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변함 없는 것은 우리는 시간 속에서 마지막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모르겠다”라는 말이, 미래를 예측하지 말자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예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래가 항상 우리가 생각한 대로 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준비해야 하고, 또 그 준비할 수 있음을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대부분 그것을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요.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했다는 설도 있고, 원래 있던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내일 종말이 올 것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것을 알 수도 없겠지만, 저는 적어도 사과나무는 안 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남은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처럼 말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