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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C.C.) 인지 감수성

스펙트럼

예방치과 진료실에서는 보통 환자의 주소(C.C.)가 특정 부위에 대한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강위생 실천과 관련하여, ‘오른쪽 어금니 치간 칫솔 사용이 어렵더라’ 내지는 ‘알려준 양치질 방법을 적용하기 너무 귀찮더라’와 같은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자가관리 습관에 대한 조언을 반복해서 제공하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고, 친근한 단어를 고르거나 적절한 억양을 사용하는 능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각종 임기응변을 포함한 말솜씨가 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된 말솜씨에도 불구하고, 환자와의 대화가 벅찰 때도 많습니다. 진료실의 오랜 내원객이 친근하게 늘어놓는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내용을 연관하여 낚아채기에는 아직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가령, “병원에 들어가 있느라 약속 날짜를 한 번 바꿨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병원에 갔던 것인지, 특정 질환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져 구강위생 관리의 실천이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를 살피는 사고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환자가 언급한 내용의 이면까지를 충분히 인지하는, 주소(C.C.) 인지 감수성을 기르는 데에 차트 리뷰가 중요하다는 팁을 선배님들로부터 건네받곤 했지만, 이를 실천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전공의 생활의 분주함으로 인해 예약 환자의 직전 내원 차트 리뷰는 고사하고 방금 진료를 마친 환자의 차팅조차 못다 한 채 다음 진료에 임할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현실이라는 핑계에 기대 있던 어느 날,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타과 의뢰로 예방치과에는 처음 방문한 환자였는데, 착색을 마치고 보니 특정 분악이 특히 잘 닦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른손잡이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인지라 자신에 찬 목소리로 혹시 오른손잡이신가요? 라고 던진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어색하게 들어 올린 의수(義手)였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슬쩍 돌려다 본 그의 얼굴에 멋쩍은 표정이 드리웠습니다. 제 미흡함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잘 알고 있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다가 결국 횡설수설 얼버무리며 소공포를 덮고 말았습니다. 관리를 마치고 불편한 걸음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에서조차 그가 느꼈을 당혹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 이후, 매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다음 날 진료 예정인 환자의 기록을 리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과의 기록을 모두 확인하여 환자를 만났을 때 반드시 체크해야 할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두고, 방사선 사진이 필요한 경우 데스크에서 미리 안내할 수 있도록 예약 장부에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당일의 진료가 수월해지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리뷰 속도도 제법 빨라져서 하루 한 시간 이상 걸리던 것도 이제는 30분 내외로 줄어들었습니다.


고작 이만큼의 시간조차 투자하지 못해 그간 마주해온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주치의의 권위와 임기응변을 무기 삼아, 별것도 아닌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 민망함을 온전히 환자의 몫으로 전가했던 장면입니다. 용기가 부족해 건네지 못한 사과를 담아, 이제부터라도 진정성 있는 진료를 이어나가야겠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