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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로 바닥을 닦을 순 없어서

스펙트럼

자그마한 나의 원룸에서 샤워하고 있었다. 몇 번 사용할 땐 크기가 줄어들었는지도 몰랐던 비누가 어느새 아주 자그마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세수하려고 그 얇은 비누를 들어보니, 사용하기엔 참 애매한 크기라 반으로 접어 변기에 버리려 했다. 반으로 접은 뒤 변기에 넣으려 보니, ‘어제만 해도 내 얼굴을 씻어주던 고마운 친구인데 변기에 버리는 건 너무 푸대접하는 게 아닌가….’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다음 샤워할 때 억지로 힘들게 비벼 한두 번 더 쓰다 기어코 다 사용했다.

 

비슷한 경험이 몇 번 더 있었다. 보건소에 새로운 이동식 치과 버스가 생겨 체어 관리 방법을 읽다 보니, 칫솔로 하수도 쪽을 청결히 닦아달란 내용이 있었다. 마침 내가 쓰던 칫솔도 교체 시기가 되어서 내 칫솔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비슷한 마음이 들어서 내 칫솔은 쓰레기통에 고이 버리고 새 칫솔을 하나 꺼내어 하수도 청소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괜히 아까운 칫솔 하나 낭비하는 셈이 되었지만, 묘하게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물건 버리는 건 참 잘한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인 것 같다. 뭔가 용도에 귀천을 따지게 되는 것 같은데, 물건의 인격을 내 마음대로 부여해 갑자기 그 물건이 험한 일을 하게 된다면 안쓰러울 뿐이다. 아마 버려지는 건 죽음이라 생각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존심이 상하느니 차라리…. 막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참 무서운 생각이긴 하다.

 

물건에 인격을 부여하는 나의 이상한 습관은 어릴 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는데, 하루는 내가 가지고 놀던 인형들을 깨끗이 빨기 위해 어머니께서 다라이¹에 세제를 풀어 인형들을 푹 담가놓았는데 지나가던 내가 얘들이 숨을 못 쉴 거 같아서 얼굴만 전부 빼꼼 꺼내놓았다고 한다. 지금 보면 굉장히 귀여운 기억이지만 사실 기억에는 없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기억에 없는 그 어린아이도 나긴 나인가 보다.

 

DNA는 아직 그대로기에 요즘에도 내가 사용하는 각종 치과 기자재들에 인격이나 귀천을 부여한다. 환자 입에 들어가는 버나 좀 비싼 기구들은 애지중지 다루며 깨끗이 닦고 쓰면서도, 핸드피스 페달같은 것들은 나도 모르게 발로 툭툭 차게 된다. 별로 소중히 다루지도 않고. 모든 물건이 힘을 합쳐 진료에 도움을 주는데도, 나도 모르게 밉게 행동하고 있었다. 사실 전부 다 소중한 물건인데. 하는 일로 귀천을 따지는 건, 조선시대 사람들이 백정이나 망나니를 천대했던 과오를 또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글을 쓰다가 갑자기 마음이 심각해졌다.

나 혼자 이런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을 해보니, 다행히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문득 어릴 때 열심히 보던 도깨비 만화 “꼬비꼬비”가 떠오른다. 오래된 물건은 도깨비가 된다는 우리네 전설을 토대로 만든 만화인데, 30대 원장님들은 아마 아시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전설만 봐도, 물건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나 혼자 하는 상상이 아닌 굉장히 오래된 상상인 듯하다. 그 안에서 귀천을 따지지는 않겠다만. 또한, 전 세계 어린이(관객이었지만 완결 때는 어른이 된 관객들까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 “토이 스토리”도 있는 걸 보아하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묘하게 안심이 된다.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되돌아보니 역시 작은 교훈과 함께 마무리된다. 앞으로는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만큼은 귀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쓸데없이 귀천을 따지지말고, 모두 소중히 대하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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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래용 대야로, 지름이 크나 높이는 반~한 뼘 정도인 플라스틱 통의 부산 사투리. 다들 아시겠지만, 붉은 갈색이나 하늘색이 많았다. 우리 집 다라이는 하늘색이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