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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정 사비나 수녀] 먼저, 물꼬를 틀까요?

홍현정 사비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먼저, 물꼬를 틀까요?

  

밤농사를 짓는 한 수녀님의 이모가 첫 수확을 보내주셨습니다. 저희만 먹기는 아깝지요. 늘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시는 이웃집 자매님, 어려운 중에도 성실하고 기쁘게 생활하시는 분식집 부부, 꼬마들의 도서실이자 동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내는 문화관 식구들, 느리고 작고 불편한 행복을 실제로 생활하면서 삶으로 전파하는 ‘느작불’ 센터의 언니, 가까이 사는 수도원의 형제들… 식구 수를 염두에 두며 봉지마다 담노라니 넉넉한 농부의 손이 보내주신 두 자루 가득한 밤도 어느새 동이 납니다.


오랜 만에 나눌 것이 있다는 기쁨에 신이 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다음날, 분식집 앞에서 만난 자매님은 우리에게 순대를 사주고, 분식집 형제님은 김밥을 한 줄 더 얹어 주십니다. ‘느작불’ 언니는 감기 조심하라고 은행잎으로 염색한 회색 목도리와 함께 집에서 키운 수세미를 보내주셨습니다. 효소를 담아 먹으면 겨울 내내 기침 감기는 뚝! 이라고요. 효소가 잘 숙성하면 한 병 보내드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한 일은 없는데, 있는 것을 정리하고, 나누고, 받고, 쓰고… 식구들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주부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듯,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낸 밤 두 자루가 온 날, 제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무엇이 남았는지요… 이웃과의 친교와 따뜻한 마음, 함께 나눈 이웃들의 걱정거리, 기쁨들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으로 제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얼마 전부터 저희 집 대문에 “강은 흘러야 합니다.”라고 큼지막하게 걸어두었습니다. 4대강 개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느라고 한 것이지만, 문을 드나들면서 오히려 제게 더 큰 묵상거리가 됩니다. 흘러야 하는 것이 강만이 아니지요. ‘내 것’이라고 하는 것, 내 존재, 능력, 가진 것 모두가 실은 다른 데에서 흘러온 것이고, 이것은 또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야 생명이 자라납니다. 흐르는 것은 생명을 주고, 막힌 것은 죽음을 낳습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로 흘러들어온 것을 내 것인양 움켜쥐고서 나눔의 흐름을 막아버린다면 그 흐름 자체에 깃들이는 생명을 어떻게 맛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흐름을 막는 것이 다름 아닌 내 안에 많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는 착각,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내 것을 먼저 챙기려는 욕심, 겉으로나마 ‘쿨’해 보이려는 허세… 사회는 이런 내 마음의 확대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깐 우울해 집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참으로 소중한 것, 참으로 진실된 것, 생명을 키우는 참 기쁨을 갈망하게 됩니다.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쉬운 것, 가장 작은 것을 나누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눈빛, 격려의 미소, 관심어린 말 한 마디… 가장 가까이 있는, 그래서 더 소중한 사람들을 향해 이 흐름의 물고를 터보면 어떻겠는지요?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누리는 삶, 더 이루어서가 아니라 더 깊이 봐서 풍요로운, 나의,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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