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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순 데레사 수녀] 첫 마음

종|교|칼|럼|삶


노석순 데레사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첫 마음

  

얼마 전, 산에 난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예쁜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왔노라며 한 할아버지가 제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왜 수도자로 살아가느냐고, 부모님들이 마음 아파하시겠다며 뭐가 그리 좋아 편리한 세상을 등지고 힘든 길을 택해 살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발걸음마다에 바스락 소리를 내며 함께 걷고 있던 낙엽도 할아버지와 같은 질문을 하는 듯 들립니다. 바스락 바스락….


한해의 끝이 다가오고 다른 한해를 맞이할 때면 왠지 모를 숙연함에 저 자신을 삶의 애착에서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는 이 길을 걷기 시작할 때의 첫 마음을 되돌아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수도자의 길, 13년 전 내 삶의 전부를 던지듯 고향을 떠나 수녀원으로 입회를 하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작은 시골마을에 가톨릭 신자는 제가 처음인지라 수도원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마을 이장님은 방송으로 기도학교에 입학하러 아침에 떠나니 인사를 나눌 분은 마을회관으로 나오라는 방송에 저는 웃었습니다.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등을 돌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읍내까지 택시타고 가라며 오천 원을 건네시고는 넓적 지게를 지고 나가셨습니다. 가시는 뒷모습에는 자식의 확고한 의지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주시는 아버지의 또 다른 사랑이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짐들과 함께 어머니와 마을 회관에 나가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나와 계셨습니다. 명숙 할머니는 지금이라도 가지 마라며 우셨고, 동숙이네 엄마는 기도학교 졸업하면 얼른 와서 시집가라며 거친 손으로 제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옆집 할머니는 버스타면 먹으라고 고구마와 식혜를 준비해 주셨고, 밑에 집 할머니는 가다가 목마르면 야쿠르트 사먹으라며 치마를 걷고 안주머니에서 비상금 삼천 원을 쥐어주셨습니다. 종훈이 할아버지와 이장님은 그동안 해 준 심부름이 고맙다 시며 수녀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와 밥 한 그릇 사먹으라며 이만 원을 주셨습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땀 냄새나는 천원권 지폐가 쌓였습니다. 시간이 되어 택시가 마을 회관에 도착했고, 동네 어르신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듯, 저를 향해 손을 흔드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손에 가득한 천원권 지폐를 바라보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동네 어르신들의 순수한 마음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어머니와의 헤어짐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수녀원에 도착한 저는 마냥 신이 났고 기뻤습니다. 어머니는 수녀님과 잠시 말씀을 나누신 후‘나 갈란다. 잘 살아래이’하시고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집에 오구, 아프지 말구, 밥 잘 먹구…. 이틀 전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반대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삶이 무거워 질 때 마지막에 돌아갈 곳을 마련해 주시고 수녀원을 나서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저의 전 존재를 향한 사랑의 후원자이셨습니다. 반대하시던 당신의 마음을 누르시고 기뻐하는 제 마음에 그늘을 넣고 싶지 않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시는 어머니….


이렇게 저는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참된 것을 찾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나누기 위해, 그것이 참된 자유임을 알기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들어왔습니다. 많은 분들의 순수하고도 열렬한 지지와 기도를 받으며 첫 시작을 이렇게 했습니다.


한해를 돌아보는 지금, 어느 측면들은 느슨해진 것도 있고 어느 측면은 탁탁해져 곧 깨어져 버릴 것도 있고 어느 측면은 너무 날카로워 다른 이를 다치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텅 빈 마음과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힘이 되어 주는 건, 저의 첫 마음입니다.


마을 어르신들과 부모님, 가족들을 울게 했고 물러서게 했던 저의 첫 마음입니다. 그들이 보내준 사랑을 첫 마음은 기억하고 있기에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제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첫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참으로 부자입니다. 수도자가 되기 위해 인생의 작은 것들을 포기하고, 크고 벅찬 것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를 드렸는데, 그분은 전부로 다시 저를 채워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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