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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정 사비나 수녀] 한적한 데 머물면서

종|교|칼|럼|삶

홍현정 사비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한적한 데 머물면서


홍천, 기도의 집에서 한달을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 때문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조용하고 한적해서 마음을 두어야할 그곳에 두기가 훨씬 쉽습니다. 하긴 인터넷이나 휴대폰 때문에 요즘 ‘한적하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통신에서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요. 기도의 집에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언가 없어져 보면 평소 그것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되도록 정해진 시간만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제게도 이 시간이 무척 여유로운 것이, 평소 제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그리 남아도는 것도 아닙니다. 산골 생활은 뭘 하나 하는 데에 시간이나 공이 더 듭니다. 읍내에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한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야 하니, 일찌감치 나가 서 있어야 합니다. 그나마 눈이 오면 발이 묶입니다. 날이 너무 추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하늘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하던 일이나 계획이 제 아무리 중요해도 중단하고, 저를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것이지요. 자연 생각은 천천히, 몸은 부지런해지는 저를 보게 됩니다. 길을 가다 벌거벗고 속살을 그대로 내비친 채 이 추위를 견디고 있는 산이나, 얼음을 이고서도 잘도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을 여유도 갖게 됩니다. 무척이나 맛이 있습니다.


읍내에 사흘 연달아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타고 가면 10분 걸릴 길을 꼬박 40분은 걸어야 하니 편리한 차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없는 차를요. 그런데 사흘 내내 오고가는 길을 한 번도 걸은 적도, 버스를 탄 적도 없습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걸어야 할까,슬슬 고민을 하다보면 차가 멈추어 섭니다. 젊은 새댁이, 웃동네 스님이, 동네 아저씨가 차를 세워주시고, 동네 슈퍼 아저씨 배달차를 탄 적도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절절히 우러나오는데, 당신들은 소중한 만남이라 기뻐들 하십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세차를 해둘걸’ 황급히 뒷자리를 치우시는 새댁도 있고, ‘옛날엔 여기 수녀원 앞마당이 우리집 밭이었어요. 이 근처가 다 그랬거든요. 그땐 저 개울물을 길어다 그냥 마셨지요.’ 지금은 흘러간 역사가 된 옛 이야기를 해주시는 아랫집 인삼밭 아저씨께서는 개울 너머 수녀원까지 데려다 주시는 친절까지 베풀어주십니다. 내 차가 없으니 그야말로 온 동네 차가 ‘우리 차’가 되고, 온 동네 사람이 다 ‘우리 이웃’이 된 셈입니다.


새삼 제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래서 다른 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생활양식을 갖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위를 다져오기도 했고요. 좋은 의도였지만 다른 사람이 끼어들 자리를 그렇게 없애버린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곳 산골에서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아니, 말할 수 없는 느긋함이, 여유가 저를 무장해제시켜 버립니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야 하는 환경 덕분이기도 하고, 나를 필요 이상으로 분주하게 만들던 것들을 끊은 덕분이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도움을, 보완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저를 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 임시 산골생활이 제게 준 커다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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