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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순 데레사 수녀] 거룩함이 있는 곳에

종|교|칼|럼|삶


노석순 데레사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거룩함이 있는 곳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때에도 가끔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잊어버리고 싶은 것, 그리고 내치고 싶은 것들이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작아져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제안에 있는 무엇인가에 짓눌려 숨 쉬기조차 힘들 때 비로소 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제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있으면서도 없는 듯 무시당하고 감추었던 것, 이미 없어진 것처럼 잊혀지고 버림받은 것들 안에서 거룩함을 봅니다. 어두운 구석에 내쳐진 저의 약함, 부족함, 죄스러움 안에서 거룩함을 바라봅니다. 그 안에 자리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집 마굿간이 생각납니다. 화장실 모퉁이를 돌아 어둡고 구석에 서 있는 마굿간은 가족들의 발길도 뜸합니다. 버리기도 가지고 있기도 싫은 것들이 잔득 쌓여 있는 마굿간의 모습에서 제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깨진 화병과 옹기 조각들, 보다 만 책들, 낡고 이 빠진 농기구, 누군가 가져다 놓았을 짐 꾸러미들, 수명을 다한 몽당 빗자루와 구멍 난 자루, 쥐구멍


막이로 걸쳐 놓은 금이 간 바가지들이 빈 거미줄에 엉겨 먼지에 쌓여 있습니다. 짐승들의 오물과 함께 우리 가족들 안에서 잊혀지고 버림받은 것들이 모여 있는 마굿간은 생명을 잃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니, 그곳에 거룩함이 보입니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꼭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만큼 제 몫을 이루어낸 삶의 노고와 빛바랜 꿈이 담겨 있는 자태 그 모습에서 거룩함을 봅니다.


바람이 많은 날, 하염없이 뒹굴고 있는 낙엽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한 낙엽의 일생이 얼마나 거룩한지요. 아직도 코트를 걸쳐야 할 이른 봄, 눈물겹게 앙증맞은 새 순이 파르르 떨며 세상으로 나옵니다. 진달래, 수선화, 개나리꽃들이 다 지고 연두 빛 자태로 몸을 드러내면서 신록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사랑을 받습니다. 잎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살을 파고드는 뙤약볕과 상처 난 곳을 다시 후비는 폭우와 생명을 찢는 폭풍과 맞서야 하지요. 그저 멀뚱멀뚱 가지에 매달려 그 긴 시간을 미련하게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넘어서야 가을이 옵니다. 자신에게 오는 현실을 치열하게 맞부딪혀 시켜온 생명으로 잎은 가을나무에게 열매를 달 수 있는 힘을 길러 준 것입니다. 열매를 키우고 익히는 것에 마지막 사랑을 솟아내고, 겨울이 되면 살기위해 부둥켜안고 있던 가지를 스스로 놓아버리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갑니다. 자신을 삭혀 저를 나게 한 나무 밑, 거름이 될 때까지 투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곤 흔적 없이 사라져 갑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삶인지요. 아름다운 삶! 꼭 성자를 닮았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의 잎이 나고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거룩함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삶의 투신이 있고 희생이 있습니다. 알아주는 이 한 사람도 없어도 제 몫을 다하는 성실함이 있을 때 거룩함이 빛을 냅니다. 고통을 견디어 낼 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전부를 내어 놓을 때 거룩함은 깊어져 갑니다. 이 거룩함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고 타인을 위해 공동선을 위해 번져 갑니다.


거룩함은 근접하기 어려운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진실하게 담겨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곧 거룩함입니다.


추운 겨울날 노점상에 앉아 졸고 계시는 할머니와 즐거울 것 없어 보이는 일을 신명나게 하고 계시는 청소부 아저씨들에게서 거룩함을 봅니다. 주부들의 시장바구니 그 손길 안에도 만남과 헤어짐 안에도 거룩함이 있습니다. 불화와 긴장이 있는 곳에도 거룩함이 있습니다. 근심과 부족함이 있는 곳에도 거룩함이 있습니다.


주어진 한 해를 저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소박한 거룩함을 제가 있는 자리에게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성공보다는 사랑을 이루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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