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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정 사비나 수녀] 겨울 산에서

종|교|칼|럼|삶

겨울 산에서

 

홍현정 사비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한 달간 홍천 산중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게으른 탓에 자주는 못 했지만 산책도 거기선 빠트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풀도 보고, 돌도 보고, 산등성 뒤로 노을빛을 남기며 넘어가는 해님의 신비스런 뒷모습도 가만히 지켜봅니다. 이 겨울의 한 중간엔 모든 것이 추위에 적응하여, ‘최소한’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다 얼어붙은 흙도 속살을 드러내고 푸른 하늘조차 쨍- 소리가 날듯 명징하기조차 합니다.


봄에 이곳에 들꽃이 얼마나 흐드러지는지, 여름에 풀들이 얼마나 무성한지, 가을에 오디며 밤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고 있기에 이 겨울 풍경은 더더욱 삭막합니다. 한참을 찬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내려다 본 발 밑, 땅에 바싹 붙어서 말라버린 풀 하나가 말을 건네더군요. 이 겨울엔, 살아남기에도 벅찬 이 시간에는 꼭 필요한 것 그 이상은 사치라고 말입니다. 남아있는 두어 개 누런 잎조차 다 헤어진 채 납작 엎드려서 그냥 ‘존재’하는 겨울풀은 그렇게 가난해서 더더욱 큰 소리로 ‘생명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제 삶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세찬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혹독한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들끓어 오르고,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사고방식이 더 이상 옳은 것 같지도 않고, 나아갈 바도 잃어버린 채 주위는 칠흑과 같은 어둠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겨울날엔 그야말로 ‘견디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랍니다. 실패, 실망, 막다른 골목, 환멸… 이런 때엔 사람도 겨울날 풀과 같이, 돌이나 흙과 같이,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 벗어버리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가외의 것은 모두 다 말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 사람은 그가 소유하거나 이루어낸 ‘무엇’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어도 좋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 자유로운 마음으로 오직 진리를, 오직 사랑을 추구하며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여년이 지나고, 단지 생활양식을 바꾸었다고 해서 다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 고작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성취감, 내가 다른 이보다 더 나으려는 경쟁심, 심지어 더 좋은 수도자가 되려는 욕심까지... 제 안에서 열정이 새록새록 솟아나고, 그 활동이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고, 동료 수녀님들과의 관계도 다 잘 되어갈 때도 있습니다만 이런 때가 더욱 위험합니다.


꽃들과 과실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에 눈이 팔려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되니까요. 늘 경계를 한다고 합니다만 실제로 겨울이 닥쳐서 억지로 벌거벗겨지지 않고서 달콤한 꽃과 과실들을 스스로 끊어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겨울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다시 겨울 산. 찬바람을 맞으면서 제가 무엇을 벗어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지난 그동안 제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왔는지에 대한 엄중한 반성이자,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보다 더 단순하고 보다 더 가난하고 보다 더 낮은,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살았으면 하는 갈망이자 결심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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