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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새로운 마음

새로운 마음

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마리아의 전교 프란치스코회>

  

새로운 해 2011년 1월을 맞은 지 꽤 지났지만 아직 지난 해 달력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 수녀원에서 해년마다 보내주는 새 달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픈 날들을 헌 달력에서 새 달력에 옮기고 예쁜 그림들은 잘 오려내고 나서야 버리는 저의 습관 때문이지요. 유치원협회에서 지난 해 12월에 받아 놓은 작은 새해 수첩은 필요로 하는 87세의 수녀님께 깜짝 성탄 선물로  자정미사에 가기전에 머리 맡의 이불 밑에 숨겨둔 기억이 지금 나는군요. 이 연세에도 적어 기억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니 놀랍지요?


이곳 페로에 제도의 풍경이 담긴 벽걸이 달력을 운이 좋게 유치원 원장님으로부터 받아  최근에 인연이 닿아 알게 된 한국인 한 분에게 보내드렸고, 중순이 되어도 기다리던 한국 달력을 받지 못하여 올해는 없나보다 생각하며 다른 궁리를 해야했지요.


한국산 달력이 없으면 저의 가족의 음력 생일이나 한국의 축제일들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무거운 봉투가 드디어 한국에서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제일 먼저 언제가 우리 설날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전화로나마 멀리서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려구요. 그리고 그림들을 쭈욱  훑어보고 1월부터 한 달씩 들여다 보며 지난 해보다 한 살 더 먹은 생일들을 적어가며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고 지나 온 삶의 흔적들에 대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9월에 다다르자 저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한국 땅을 밟을 기회가 주어지는 달이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10년 만에 고국의 가을을 다시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저의 가슴은 마구 뜁니다. 인간적인 심상이 더 강한가 봅니다: 추석 전은 어려울 것 같고, 혹여 며칠 뒤에라도 한국에 도착하면 남은 송편 몇 조각이나마 10년 만에 맛볼 수 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제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요.


실은 종신 서원 10년 쇄신 프로그램이 9월에 잡혀 다른 자매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음은 영광의 영광이지요. 여름에 잡혔다면 유치원의 여름 방학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지만 새학기 시작 후에 어렵게 휴가를 내서라도 그립던 내 나라의 가을을 볼 수 있도록 기회가 만들어지는 신비로운 섭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 마음 한 켠에는 두려움도 자리잡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려오는 한반도의 상황들이 심상치가 않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12월까지 헌 달력과 새 달력 정리를 끝내고 나니 마치 한 해를 대강 맛 본 듯이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느낌이 저의 마음을 채웁니다.  그 어느 하나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기에 하루 하루의 시간과 공간안에 어떤 것들이 채워질지 사뭇 호기심도 생기고 내가 받은 모든 것,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 그 날만이 지닌 고유의 맛을 최대한 보고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렇듯 새해에는 세워야할 계획들이 이곳 저곳에서 생깁니다.  일하는 유치원에서도 1년 계획의 틀만 잡는데도 3시간 안에 끝내지 못했습니다. 85명의 아이들과의 한 해 살이를 위해 20여명의 직원들이 프로그램을 짜고 행사들의 날짜들을 잡고 이를 위한 운영팀을 위해 사람을 추천하고 자원받고 하면서 열기가 달아오르지요.


1년에 한 번 가는 직원 소풍을 위한 팀으로 선뜻 저의 이름을 내 걸은 제 자신에게 문득 놀랐습니다. 소풍을 간다는 것,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그것은 나를 떠나 다른 이 안으로, 내 자신의 세계를 떠나 자연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지고, 조금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나의 존재가 새로워지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그 어느 것인가를 위해 자신을 내 놓고 내 걸 수 있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이에게도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여 가정이 화목하게 돌아가고, 사회가 안정되게 돌아가고, 온 세상이 평화롭게, 그리고 온 우주가 제대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요.  지금 우리의 온 세계가 경제적인 위기의 영향을 받고 있듯이 이곳 페로에 제도에도 여러 곳의 생선 공장들이 문을 닫아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절약하라!!!”라는 구호아래 보호 받아야할 사람들이 더 어렵게 더 궁색하게 살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 처음 방문한 87세의 트리나 할머니와 새해에 대한 저의 설레임을 이야기하며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한국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저와 저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귀가 쫑긋해진다나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여 집을 나서려고 하자 할머니는 저의 손에 종이 돈 한 장을 쥐어주셨습니다. 깜짝 놀라니까 늦은 성탄 선물이라며 한국 방문을 위해 모아 두라고 하시더군요.


여행비가 꽤나 들거라면서요. 이 할머니의 머리결처럼 하얗고 고운 그분의 마음씨는 방문할 때마다 저의 마음의 때를 씻어줍니다. 몇 달 전에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떠나지를 않는 암탉 한 마리가 그 날은 비바람이 심하여 지하 창고에 있었는데 닭똥이 있는 곳마다 걸레로 닦아 내시기에 대단하시다 했더니 물이 많아서 문제 없다며 걸레를 즉시 헹구어 다시 닦을 곳을 찾아가며 마치  아기 다루듯 하시는 이 할머니께서 저의 새해 1월의 어느 하루를 예쁘게 장식해 주셨습니다.


요즘 해가 제법 길어지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식탁을 차리고 식사를 준비하러 들어오는 식당과 부엌이 불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이젠 조금 더 밝아져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봅니다.


가까운 공원에서 새들의 노래들도 더 자주 들려오구요. 올 해는 영의 맑은 눈으로 모든 것을 깊이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약함과 잘못으로 이뤄지는 우리 세상살이가 더 많아 보이지만 그 한 가운데 어느 곳엔 우리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분의 좋으심이 빛나고 있음을 믿기에 찾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곳 역시 우리 인간 삶의 한 가운데 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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