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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정 사비나 수녀] 떠나서, 낯선 곳으로 나아가기

종|교|칼|럼|삶


홍현정 사비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 프란치스코회>
떠나서, 낯선 곳으로 나아가기


제가 사는 공동체에는 신학공부를 하는 수녀님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데, 교통이 편리하고 신학교가 가까워 찾은 곳이지요. 옛날엔 부자 동네로 알려졌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조용하고 안정된 서울 뒷골목 동네 중 하나입니다. 기도하기도 좋고 가끔 식구 중 누가 늦게 돌아와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안정되고 편안한 세상 이면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분들을 잊기 쉽다는 것입니다. 신학공부가 주된 소임이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고, 사는 곳이 말하자면 ‘사대문 안’이다보니 힘든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방학에는 그분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다섯 명이 가톨릭 주소록도 뒤지고 인터넷도 뒤지고 전화에 매달린 지 며칠, 드디어 모두가 취직이 되었습니다. 간단한 옷을 만드는 장애인 자활 공동체, 쪽방촌에 사시는 어려운 분들 방문,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 방문, 이주여성돕기센터, 쉼터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언니의 공부 돕기 등 임시직이고 서툰 초보들이라도 오라는 곳들을 잘도 찾았습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려운 분들을 만나기 어렵다고 막연히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 가까이에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단추를 달거나 인형옷 만드는데 ‘시다’를 하면서, 한국인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채 딸과 단 둘이 살아가며 마음을 닫아건 필리핀 부인의 집을 두드리면서, 무심한 이웃의 말 한 마디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외톨이 할머니의 곁을 지키면서, 깊이 숨겨놓은 언니들의 이야기에 함께 마음 아파하면서 두 달이 흘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각자의 무력함을 절감하면서 기도에 더 매달릴 수밖에요. 겨우 두 달, 일 주일에 두세 번의 방문이 그분들께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정작 변화는 저희, 직접 체험을 한 다섯 수녀님들과 그를 통한 저희 공동체 모두에게 있었지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더 넓어진 것이지요. 늘 옆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장애우, 이주민, 노숙인 등 여러 의미로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기꺼이 자기 삶을 나누고 있는 분들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기회도 가졌습니다. 자칫 공부와 알콩달콩 우리끼리의 재미있는 삶에 빠져서 우리가 이렇게 사는 본래 의미를 잊어버릴 위험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은 것이지요. 그분들을 알고, 정을 나누면서 조금 더 그분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도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보는 세상이 앞으로 우리를 조금씩 바꾸어 주리라 믿습니다. 누구든 각자 자기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경험하기 마련이고, 그 시각과 경험이 또 다시 그를 형성하기 마련이니까요.  


공부를 하면서 더구나 모든 것이 보장된 안정된 장소에서 가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어쩌면 이 두 달동안 정작 저희가 열심히 찾은 것이 이러한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단계에서 찾은 답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서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하는 것. 우리 마음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하신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자리를 떠나서 내려오시어 인간의 한계와 약함까지를 친히 받아들이셨으니까요. 그렇게 우리 약함과 한계의 의미 자체를 바꾸어 주신 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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