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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순 테레사 수녀] 산에 난 오솔길

종|교|칼|럼|삶

 

노석순 테레사 수녀

<마리아의 전교 프란치스코회>


산에 난 오솔길

  

산에 난 오솔길을 홀로 걷고 있습니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자연은 제각기 소리를 지르며 저를 나게 한 창조주께 온 존재로서 환호성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깊은 고요가 있습니다. 고요함이 너무나 거룩해 평화 속에 잠기게 합니다. 한참을 걷다가 가파른 오솔길에서 숨을 몰아쉽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 마음 안에서 부터 터져 나오는 감동에 몸이 떨립니다. 생명을 잃은 고목나무에 몸을 붙여 여리게 피어난 한 송이 들꽃이 저의 전 존재를 사로잡았습니다. 아무런 말없이 이곳에 흐르는 고요함과 호흡을 같이하며 바라보고 또 바라봅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마음이 열리고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탄식과 무거운 그 무엇이 거침없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곤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평화와 위안을 얻고선 다시 저는 그 길을 걷습니다. 가파른 오솔길에 고목과 생명을 나누며 아니 한 몸이 되어 핀 작고 여린 꽃은 고해의 은총을 가져 다 주었고 하느님과의 화해성사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고목나무에 핀 들꽃처럼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이 피워 낼 수 있는 향기가 전해져 누군가의 욕심이 내려지고 선한 마음을 도로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뭔가를 이루려 애쓰지 않아도 화려한 뭔가가 배경으로 바쳐지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충만한 기쁨을 지닌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고유한 품위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의해 탄생된 힘 있는 무엇인가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품위를 대신 할 수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일본 대지진 소식은 그 자체로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 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재난현장에서도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희생이 있었고, 애틋한 사랑이 생명을 구하고, 배려와 친절로 찢어지고 갈라진 심장이 다시금 숨을 되찾고,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내일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은 사람을 통해 울고 웃습니다. 가난한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알몸으로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품위는 서로 사랑할 수 있음과 연민과 공감으로 나 자신보다 다른 이를 향해 가는 선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대지진은 점점 더 위기를 향해 나아가는 지구환경과 인류의 탐욕과 이기심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내 품었던 허상과 독선의 결과를 바라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핵발전 폐기는 선택이 아니라 수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 안에 알려지지 않는 각 개인의 슬픔은 인류의 각성을 촉구하는 일류를 대신해 짊어진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고통과 연대해야 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도움의 손길은 이 재앙이 일본의 재앙이 아님을 공감하고, 그들의 슬픔이 그들만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이 아님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 이웃과 내가 함께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모두 함께 죽어 갈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으로 향하는 우리의 도움은 개인이 아니라 이웃이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마음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되고 우리를 웃게 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품위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엄청난 값을 치룬 재앙을 통해 우리 모두가 창조주로부터 받은 품위를 되찾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로서의 존중과 사랑이 필요함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 주고 요구하지도 빼앗지도 않는 마음을 느낄 때 상대 또한 방어벽을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고 수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산길에서 만난 작은 들꽃의 존재에서 받은 감동보다 더 큰 감동을 내 이웃에서 느껴보는 오늘이길 희망하며, 또한 나 스스로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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