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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순데레사 수녀] 공원을 거닐었습니다

종|교|칼|럼|

 

노석순데레사 수녀

<마리아의 전교 프란치스코회>


공원을 거닐었습니다

  

휴식이 필요한 어느 이른 아침에 공원을 거닐었습니다. 호수를 둘러싼 벚꽃 길이 마음을 환하게 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있고, 여린 새싹이 봄 햇살에 몸을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삭막한 도심의 풍경처럼 잘 닦여진 길 위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걷고 있고 무표정한 모습에는 한 겨울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우리 모두는 자연의 흐름 안에 함께 걷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한참을 걷다가 올려다본 벚꽃은 하나 같이 자신의 속살을 내 보이며 웃고 있습니다. 가슴을 열어 암술과 수술의 조화를 보여 주고도 깊은 곳 자신의 빛깔에 저의 시선을 모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숨길 것 없는 당당함으로 속살까지 활짝 열어 보이는 자연의 몸짓이 눈을 나도록 아름답습니다. 그 안에는 겨울을 지내온 각자의 사연이 빼곡히 자리해 있고, 어떤 과장이나 왜곡 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나무 한그루에 수천수만의 아름다움이 열려 봄이 오나봅니다. 수천수만의 진실이 열려 봄에는 이렇듯 생명이 자라나 봅니다. 감추고 있던 저의 속살이 열리듯 마음이 충만해 집니다.


한 참을 걷다가 바라다본 호수 옆 개나리 넝쿨사이에서 저는 또 다시 인간의 속살을 바라봅니다.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선택한 이곳에 펼쳐져 있는 오물과 악취, 휴지통마다 넘치는 쓰레기. 그것을 치우기 위해 움직이는 부지런하고 활기 있는 청소부 아저씨들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호수를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삶의 고단함과 인생의 여유로움을 바라봅니다.


혼자 운동을 나오신 듯,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 웃음 섞인 대화를 꽃 봉우리 열리듯 주고받는 이들이 있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의 그림자 곁에는 이른 아침부터 술에 절여 비틀거리는 행려자의 발걸음이 있습니다. 주고받는 정다운 대화 옆으로 누군가로 향하는 욕설과 분노가 담긴 대화가 지나갑니다.


잘 정돈된 호수와 꽃길 모퉁이에는 눈길을 멈추고 싶은 풍경과 함께 잠시 잠깐이지만 함께 호흡하기도 싫은 것들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속살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네 시선에 따라 저 마다의 아름다움은 생명을 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의 아름다움이 저의 마음에 들어오기를 빌며 잠깐 쉴 자리에 앉아 봅니다. 바람과 햇살에 감탄하며 호수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봅니다. 그러다 문득 주변에 많았던 사람들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 남은 연인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습니다.


술에 취한 행려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란 걸 늦게 알아차린 저는 망설여졌습니다. 게다가 행려자의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기에 두려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일어나지도 않을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맞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러한 상황 앞에 제 안에 있는 선입견과 편협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얼마나 많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 왔는지 잠깐이지만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행려자는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저는 태연한척 책을 펼쳤습니다. 발걸음의 무게가 점점 가까워지자 고개를 들어 호수를 바라보며 행려자를 보았습니다. 저를 향해 웃어주었고 저도 웃었습니다. 행려자가 제게 준 웃음이 벚꽃의 속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저를 지나쳐 자판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제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앉아도 되는지 묻고선, 호주머니에 있는 사과 하나를 쪼개어 저에게 권했습니다. 자신은 치아가 없어 칼로 얇게 여며서 먹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한 시간의 만남이 그다지 길지 않음은 그가 들려준 가슴 아픈 속살의 진실함 때문이었습니다.


가끔 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선입견으로 다른 이들의 속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저에게 행려자와 만남은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벗꽃이 보여주는 속살에 저의 속살도 내 보이고 싶은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봄은 이래서 아름답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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