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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참 곱다

눈, 참 곱다


천천히 봄이 오는 듯, 하여 그래도 아쉽게 떠나보낼 겨울을 보면서 ‘눈’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번 겨울, 눈이 아주 많이 온 그 날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음, 그 날 저녁, 우리 수도원 모든 형제들은 식사를 한 후 빗자루를 매고 수도원 마당과 대문 앞 길가의 눈을 쓸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고맙게시리, 당시 심한 감기, 몸살로 방에만 누워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눈은 펑펑 내리고, 쓸어도 또 쓸어도 눈은 쌓여만 가고, 형제들이 눈을 쓸며 숨을 쉴 때 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얼마나 눈을 쓸었던지 온 몸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났습니다. 이런 눈은 연인들이나 좋아할까, 내가 만약 저 눈을 쓸었다면 하늘만 원망했을 정도의 눈이었지만, 형제들은 묵묵히 눈을 쓸었습니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다음 날 아침 영하 14도라는 보도를 하는데, 그만 기겁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눈이 온 다음 날 온도가 영하 14도라면, 길은 모조리 다 얼어버릴 것이고, 말 그대로 도로는 빙판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창밖을 보니, 눈은 계속 내렸고, 시간이 흘러 밤이 되어도 눈은 멈추지 않았으며, 창밖을 내려다보니, 언제 눈을 치웠냐는 듯 마당에도 대문에도 거리에도 멀리 지붕에도 온통 흰 눈이 쌓여만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나는 방에서 조용히 쉬었지만, 마당과 대문 그리고 도로 양 가로 쌓여진 눈들은 녹을 기미도 없이, 바람은 살을 에는 얼음 바람이 되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몇 일 후 신학교에서 거주하는 동창 신부님이 해외 선교 발령을 받아, 몇 몇 동창 신부님들이 식당에 모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감기도 다 떨어질 무렵이라, 온 몸에 두툼하게 옷을 두른 채 얼음 바람을 맞으며 약속 장소로 갔고, 그 식당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동창들끼리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이 화제가 되었고, 몇 일 전 ‘눈’이 온 그 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운이 좋아서 감기 몸살 때문에 앓아 누었다고 했더니, 신학교에 거주하는 그 동창 신부님은 낮은 목소리로 ‘나는 그 날 운동 삼아 뭐, 밤 새 눈을 네 번 쓸었지, 뭐’라 말하였습니다.


그 말인 즉, 당시 신학교는 겨울 방학이라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없었고, 다만 사제품을 준비하던 고학년들이 한 달 피정을 하였으며, 신학교 운동장에서 그들이 서품 피정을 준비하는 숙소로 올라가는 길이 경사가 있기에, 피정 중인 신학생들이 혹시나 넘어져 다칠까, 행여 미끄러져 부상이나 입지 않을까, 이러 저러한 걱정이 들어서 마냥 창문에서 내리는 눈을 쳐다만 볼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빗자루 하나 들고, 천천히 그 경삿 길을 한 번 쓸고, 그러다 다시 쌓이면 따스한 차 한 잔 마신 후 천천히 한 번 더 쓸고, 그러다 또 다시 쌓이니 다시 쓸고, 그러다 또 다시 쌓였으니, 한 번 더 쓸었습니다. 그냥 무심의 마음으로, 그냥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눈 내리는 추운 밤, 사제직을 향해 부지런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신학생들을 위해 아버지의 마음으로, 혹은 맏형 또는 좋은 선배의 마음으로 행여 사제직 준비에 ‘눈’이 방해나 될까, 그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들지 못해 장갑 낀 두 손이지만 그래도 추워 입김 불어가며, 코에는 콧물까지 흘리며, 경사진 마당을 어린 동생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혼자 우직하게, 눈을 쓸고, 또 쓸고 하는 어느 무심한 마음의 사제를!


‘눈’이 펑펑 오는 날! ‘그 눈’을 보며 ‘이 악마의 똥가루!’하면서 눈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과 자족감을 갖고 혼자 ‘허허’ 웃으며, 사랑하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에 눈을 쓸면서 스스로 기뻐하는 그 모습! 스스로 선한 삶을 사는 삶에 만족하는 삶, 인생 사는 괜찮은 마음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족감’, 단지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꾸준히, 매사에 세상을 긍정하며, 착한 마음과 함께 착한 행동을 해 나가는 선을 닦는 마음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작지만, 큰 행복의 길을 걷는 자족감!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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