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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보는 의사

인간을 보는 의사

  

박성현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몇 해 전 지방에 사시는 아버지의 암 진단과 관련한 사건으로 우리 집안이 난리법석을 치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화가 되지 않고 몸에 힘이 없어 동네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췌장 근처에서 종양으로 의심되는 영상이 발견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의사는 종합병원 정밀검사를 권유했고, 종합병원의사는 MRI 사진을 본 후 세포검사를 위한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탈하게 지내왔던 우리 가족은 어느새 잠재적 암환자 가족이 되어버렸다.


 불안한 심정에 가족들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췌장암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구하는 것이었다. 급작스런 위험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통제감을 얻기 위해 강박적일 정도로 정보를 모으게 되는데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온갖 치료법들과 식이요법들 그리고 암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은 췌장암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들을 수집했다. 이런 와중에 췌장 세포검사 수술 자체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MRI 판독을 다시 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병원에 특진 예약을 하고 상당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버지와 온 식구들이 서울의 한 종합병원으로 모였다. 종합병원의 풍경이 예의 그렇듯 수심에 찬 사람들로 북적이는 복도에서 한 참을 대기한 후 의사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컴퓨터 화면에 아버지의 복부 영상으로 보이는 사진이 올라와있고 그 앞에 의사가 앉아있었다. 의사는 무척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 종양이 5년 내 악성으로 발전될 확률이 50% 이하 이므로 환자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고 말했다. 조마조마하게 의사 선생님의 판결(?)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때 나에게 보였던 매우 이상한 광경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의 가족은 물론 환자인 아버지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시선은 컴퓨터에 고정돼 있었는데 그분에게 오로지 관심은 컴퓨터 화면에 올라있는 환부인 것처럼 보였다. 가족들은 이것저것 그간 궁금했던 질문들 예를 들어 “차가버섯이 췌장에 좋나요?” 등등을 의사에게 꺼내놓았지만, 의사는 매우 단호하게 “그런 것 하지마세요”라는 단답형 답을 줄 뿐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의사 선생님의 바쁜 다음 일정을 방해하는 것 같은 마음이 되어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의사로부터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무언가 마음을 개운치 않게 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을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며 보내왔던 그간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그 의사는 자신의 책무를 오로지 환자의 병든 부분에 대해서만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니 그 의사와 병원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비난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기도 했다. 진지하게 그 의사의 행동을 숙고해보면 이것이 꼭 그 의사의 개인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상황적인 요구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의사들의 일상에 대해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그 분들이 얼마나 바쁜 일정들을 소화해 내야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종합병원 의사에게 물어보니 하루 진료해야하는 환자가 100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의사들이야 말로 최악의 환경에 놓인 감정 노동자들인 것이다. 그 의사분이라고 처음부터 그랬겠는가?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아무리 인간애가 넘쳐나는 의사라 하더라도 수 많은 환자들에게 인간적인 관계나 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했던 그 의사의 행동을 모두 환경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아쉬운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환자는 단순히 병이 든 신체의 부위만을 가지고 의사를 만나러 가지는 않는다. 신체의 병 뿐 아니라 이와 연관된 마음을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환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병뿐 아니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의사의 돌봄을 바라는 기대가 있다.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의사의 바쁜 형편을 모르는 환자도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기본적 태도일 것이다. 환자를 환부가 아니라 인간 전체로서 대하는 태도는 매우 간단한 행동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눈맞춤, 환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어린 표정, 환자의 이야기에 경청해주는 자세 등등. 환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의사의 온정어린 태도야 말로 병든 신체의 회복만큼이나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의미있는 치료가 아닐까? 의술만큼이나 의덕을 중요시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환자와 가족들에게 선물해주는 의사와 병원을 기대하는 것이 나만의 욕심일까? 


박성현 교수 프로필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상담심리) 박사졸업
·서울불교대학원 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조교수
·(전)한국상담심리학회 자격검정위원장
·한국명상치유학회 선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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