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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버림에서 시작하기

믿음, 버림에서 시작하기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작년 가을 즈음, 지금 살고 있는 수도원 총본부 건물이 너무 낡아, 새로 공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 이유로 총본부에서 생활하는 모든 형제들은 공적인 물품 이외에, 꼭 필요한 개인 짐들만 챙겨두고 다른 분원으로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당장에 쓰지 않을 나머지 짐들은 개별적으로 박스에 담아 공동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짐을 정리하는 동안, 지금 당장 필요한 물품들과 몇 달 후에 사용해도 되는 짐들을 분류하면서, 내가 이렇게도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원에 들어올 그 때, 한 평생을 무소유, 즉 ‘청빈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에 또 다짐을 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마음은 다 어디가고, 사십대 중반이 된 지금, 이렇게나 많은 물건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죽은 후, 형제들이 내 방을 정리하러 들어 왔을 때 어떤 말을 할까!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뭐, 이딴 것 까지 여태 가지고 다녔을까! 이렇게 사느라 참 힘들었겠다’며 과감하게 그것들을 버리는 모습 … 창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는 왜 지금까지 그러한 잡동사니들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 하는가!’ 그건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 대부분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러 저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어야지, 저것은 이러 저러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있기에 잘 놓아두어야지’ 그리고 그런 생각과 맞물려, ‘이것은 언젠가 꼭 필요할거야’라는 생각이 섞여, 결국 움켜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부끄럽게도 그렇게 움켜쥔 것들 중에는 나에게 쓸모없는 것들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아끼다 보니, 유통 기간이 지나버린 것들도 있었습니다. ‘의미를 두는 것’과 ‘이 다음에 필요하겠지’라는 생각 … 때로는 이런 것들이 물질에 대한 집착적 소유를 강화시켜, 나도 모르게 작은 내 방을, 점점 더 비좁게 만들었고, 결국은 내 마음마저, 속 좁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두 사람이 공동으로 쓴 ‘잡동사니의 역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물질의 지배에 빠져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끝도 없이 그런 물건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면서도 단 한 개도 버릴 줄 모르는, 심리학 용어로 ‘저장 강박’의 저주에 걸린 현대인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장 강박’ 증상자 가운데 공교롭게도,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이들도 많았고, 때로는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물건을 바라보는 어떤 독특한 심미안을 가져, 보통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물건들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해당 물건의 가치와 의미를 확장해가기를 즐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혼자 ‘뜨끔’ 하였습니다. 


‘아, 혹시 내가 저장 강박증 환자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받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습니다. 때론 어떤 것들은 영원히 간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함이 오늘 지금까지, 진심으로 남아있는지, 아니면 ‘남 주기 아깝고,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유욕과 애착심에 대한 변명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다음에 필요할거야!’라는 마음을 접고, ‘이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 이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나누고, ‘지금 필요한 그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더 가치 있는 소중함을 간직하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뭔가 필요할 때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채워 줄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 궁극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또한 ‘이 다음에 필요할 것들’이, 때로는 알고 보면, 이 다음에도 꼭 필요하지도 않을 것임을 아는 것, 꽤 괜찮은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청빈의 마음’인 듯 합니다. 문득 ‘사람을 믿는다는 것’, 그건 어쩌면 ‘앞으로 필요할 것들이라 생각해서 움켜쥐고 있는 그 마음을 내려놓음’의 또 다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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