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위로와 격려

위로와 격려


변경수 목사
동녘교회


요즘 사회적으로 ‘힐링’이 대세입니다. 성인 프로그램은 물론 아이들 프로그램도 무슨무슨 ‘치료’라는 말이 많이 들어갑니다. 치료는 ‘병이나 상처를 잘 다스려 낫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이들 프로그램에 이 단어를 쓰는데에는 우리 아이들을 건강한 성장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극심한 학습노동에 시달리고, 학원폭력, 왕따 등 홀로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나온 표현법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습니다. 상처받았을 때 치유하지 않으면 왜곡된 삶을 걸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몸과 마음을 다스려줘야 합니다. 몸은 보이기 때문에 뭘 해야하는지 아는데,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저는 마음의 상처에 가장 좋은 힐링은 ‘위로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시처럼 ‘사람’(외로운 존재)에게 가장 큰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괜찮아, 너! 정말 그건 잘했어, 잘될거야 걱정하지 마, 그랬군요’와 같은 지지하고 격려하는 말들일 것입니다. 위로(慰勞)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로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행동이 따라줘야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함께 맞는 비’라는 시에서 말로 그치는 것은 온기가 없는 위로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慰勞)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우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치유의 시작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 ‘나 아파!’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 한명은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그 순간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묻지마 폭력’은 다름아닌 ‘물어줘!라고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강팍해지고 팍팍해져 가는 이 시대에 위로와 격려는 가장 훌륭한 힐링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에서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만 배웠지 추위에 떨고 있는 베짱이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는 ‘젊음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개미와 베짱이’를 새롭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프랑스 버전이 인상적입니다. “개미들이 밖에서 떨고 있는 베짱이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여름내 노래를 들려줘서 우리는 고단함을 모르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자, 여기에 당신 몫이 있습니다”라며 음식을 나눠줍니다.” 개미의 배려있는 행동과 말에 베짱이는 자신이 헛살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은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입니다. 개미의 격려가 베짱이를 살리고 개미는 춥고 지루할뻔한 겨울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상생이 이루어졌습니다.


“삶은 ‘사람’의 준말”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생각납니다. “삶은 사람의 준말입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며/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알파(처음)와 오메가(끝)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위안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는 위로도 있지만 사람에게 받는 위로도 있습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의 정신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관련기사 PDF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