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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할아버지

왜가리 할아버지

 

박성현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새해를 맞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중년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십대 이십대 때는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지나가던 시간들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문득 느낀다는 건 그만큼 세월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삶의 유한성을 피부로 절감하게 되면서 삶을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송곳처럼 예리하게 중년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신년 초 우리 가족은 새를 좋아하시는 장모님을 위해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늪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고니, 청둥오리, 검둥오리 등등의 철새들이 군집해있는 우포늪의 아름다운 광경에 빠져 우리 가족은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강추위도 잊은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망원렌즈가 달린 사진기로 철새 사진을 찍고 있는 노년의 남성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로 봐서는 전문적인 사진작가인가도 싶었지만, 낡은 군용 점퍼와 바지차림에 소형 트럭을 몰고 왔으니 그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갔고, 그 분은 자신을 우포늪을 지키는 왜가리 할아버지라고 소개했습니다. 교사였던 그 분은 이십여년 전 우포늪을 찾은 이후 우포늪의 생태와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아예 거처를 우포늪 근처로 옮기고 우포늪 지킴이로 살아오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왜 트럭을 타고 다니시냐고 물었더니 우포늪으로 찾아오는 독수리들의 먹이를 운반하기위해 자신의 승용차를 팔고 트럭으로 바꾸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우포늪의 개발을 원하는 동네 사람들과 마찰도 있어서 얻어 맞기도 하고,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고초를 마다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포늪 지킴이를 왜 하시게 됐느냐는 물음에 왜가리 할아버지는 전혀 주저함 없이 우포늪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와 후손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 가족은 왜가리 할아버지가 소개한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지금은 동네 사람 모두 우포늪 보전을 위한 왜가리 할아버지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으며, 우포늪이 국제적인 생태 환경 명소로 알려지면서 지역 경제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왜가리 할아버지의 확신에 찬 눈빛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 씀씀이는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 나도 저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석심리학자인 융은 인생 전반부와 후반부의 삶의 과제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생 전반부에서는 자기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는 것이 과제인 반면, 인생 후반부 즉 중년 이후의 삶의 과제는 자신을 초월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초월한 삶이란 자신을 남을 위해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융에 따르면 청년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중년 이후에도 자신의 욕구충족 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병들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중년의 삶이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어떻게 쓸지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새해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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