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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의 사슬

헌신의 사슬


어려서부터 알던 선생님 한분이 부탁이 있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부탁인 즉, 자신의 나이든 언니가 많이 아픈데 아무래도 마음의 병인 듯싶으니 한 번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댁으로 향하는 길에 그동안 언니분이 많은 희생을 하며 살아오셨다는 얘길 들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분은 아주 곱게 나이가 드신 분이었다. 말씨,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 모두 얌전하고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서일까? 문득 저렇게 평생을 사셨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그분에게 그냥 편하게 누워계시라고 했다. 그러자 부끄럽고 조심스러워하며 자리에 누우셨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깊이 하며 마음을 푹 쉬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내버려두기를 5분정도. 누구도 입 떼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우리의 행동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언니분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지금 현재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대략 들어 알고 있던 나는 그분의 삶이 안타까워 그분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그리고 뜨문뜨문 말했다. “…왜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제는 다 놓아버리세요. 괜찮아요.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다. 갑자기 언니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서 굵은 눈물이 샘솟는 게 아닌가. 나 또한 목이 메었다. 얼마나 침통하게 우시는지 도저히 달랠 길이 없었다. 식구들도 따라 울정도로 슬픈 기운이 방안에 가득했다. 한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언니분의 눈물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60세가 넘은 우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일생동안 자신의 언니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놀랍기도 할 밖에.


언니분은 늘 다른 사람만 돌보며 살았지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늘 웃는 모습으로 ‘나는 괜찮아’를 연발하며 살아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야말로 성자 같은 모습으로 일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언니분의 삶은 남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지켜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남을 위해 사는 인생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자신을 진정 위할 줄 알면서도 남도 또한 위할 줄 아는 이의 삶은 더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법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보살피는 사람을 훌륭한 인품으로 평하지만, 꼭 그러한 삶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인생도 가치 없는 삶이란 없다.


혹여 누군가 나에게 그럼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하리라. 결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남을 위해 헌신하지는 말라고 말이다. 자신의 삶을 가꾸고 자신의 인생을 위해 열정을 다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갖춘 고운 심성이야말로 다른 이의 삶까지도 소중하게 보살필 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희생 말고, 우선은 자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연후에 자신을 지키는 마음으로 다시 내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야 움츠렸던 내 삶이 활기를 되찾고 향기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원 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


원 영 스님 프로필
·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
·불교신문,중앙일보 집필진 활동
·대학 및 대학원 강의 중
·저서 <대승계의 세계> 2012,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10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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