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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심과의 접속

우주심과의 접속


정색을 하고, 전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완전히 힘을 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은 대개 담담하고 심심하다. 그래서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람들이 짜릿함과 자극을 구하는 것은 일상이 감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끔 벗들과 ‘잡담회’를 연다. 말 그대로 잡담을 하는 모임이다. 잡담회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배제하지 않는다. 주제는 없다. 그 시간, 그 장소가 우리에게 시키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제한은 있다. 가급적이면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이나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은 경청하되 거기에 대해 비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논쟁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잡담회에서의 논쟁은 대립하는 두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침묵 속으로 몰아넣을 때가 많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꼭 의미있는 이야기여야 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미 의미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찻집의 안락한 의자에 기대 앉아 일곱 여덟 명의 벗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대면인 사람들도 있어 잠시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흥미롭게 여기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위주가 되었다. 흔히 남자들이 만나면 서열을 확인해야 편안해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처럼 대화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잡담회에서는 학번이나 나이는 묻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자기 존재로서만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 참석자들은 자기와 다른 삶의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인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자발적 모임이었기에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영화를 만드는 한 제작자가 자기가 찍었던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망원경 렌즈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수 없이 많은 별 자리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우주 공간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은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미 가뭇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저 우주공간의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었다. ‘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던 파스칼의 말도 떠올리며.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치과의사인 한 길벗은 스쿠버 다이빙에 푹 빠져 지내는 이야기를 꺼냈다. 바닷 속에서 만나는 황홀한 세계는 신비 그 자체였다. 그는 그 아름다움의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닷 속에서 경험하는 일몰과 일출의 황홀함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일상을 잊었다. 왠지 치유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여 년 동안 백두산 호랑이를 추적해 온 박수용 감독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다.


“숲을 걷다보면 부엉이가 토해낸 펠릿(부엉이 같은 맹금류가 들쥐나 새 같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 뒤 소화가 되지 않은 털과 뼈를 뭉쳐서 입으로 토해낸 것)들이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부엉이는 가지 위 쉼터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올려다보는 순간, 부엉이는 날아갈 것이다. 나는 부엉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그냥 지나간다. 숲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작은 파문 대신 평화를 유지한다. 실체를 보지 않아도 그 자취만으로 믿는 것, 이런 것이 자연에 대한 믿음이다.”(박수용,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201쪽)


충동을 자제하고 올려다보지 않는 것, 그것은 다른 생명에 대한 배려이다. 그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잃어버렸던 우주심과 접속한다.

  

김기석 목사 프로필
·감리교 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저서: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오래된 새 길>,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외 다수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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