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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에 초대받다

종교칼럼

뒤늦게 살림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자리에 누운 후, 30여 년간 거의 독점적으로 수행해오던 아내의 살림이 내 차지가 되었다. 아내는 허둥거리는 남편을 보며 옆에서 혀를 차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초보 주부이니 말이다. 바깥 일이 분주하다는 핑계 하에 청소나 설거지 등에만 한정했던 나의 역할이 확장되자 몸은 바빠졌지만 마음은 여러 모로 즐겁다.


그동안 차려진 음식만 무심히 허겁지겁 먹던 처지인지라,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곤 한다. 신 김치를 활용해 찌개를 끓일 때 매실 엑기스나 설탕을 조금 가미해야 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나는 비의를 전수받는 도제처럼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찜기를 이용해 고구마를 삶거나 채소를 데칠 때 바닥 물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울 때에는 물을 조금 뿌려주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도 배우고 있다. 상을 차릴 때도 찬 음식을 먼저 내놓고 그 후에 덥히거나 끓이는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는 것을 시행착오 끝에 익혔다.


직접 상을 차리다보니 음식 먹음이 곧 하늘을 모시는 일임을 알 것 같았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은 ‘쌀 한 톨의 무게’가 온 우주의 무게라고 노래했다. 웬 과장인가 싶지만 쌀 한 톨 속에는 바람, 천둥, 비, 햇살, 외로운 별빛, 농부의 새벽 등이 담겨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눈을 뜬 사람에게 일상의 모든 순간은 신비로 변한다. 그런 생각 때문일 것이다. 쌀과 잡곡을 씻어 일고, 밥솥에 안치고, 뜸이 푹 든 밥을 푸는 일련의 모든 행동을 나는 마치 예전을 집례하는 성직자처럼 조심스럽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예전부터 즐겨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을/비 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그렇게 허겁지겁 먹어 버리면/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허겁지겁’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툭 친다. 가속화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이 신비임을 알아차릴 내적 여유조차 없이 쫓기듯 살아간다.


살림을 규모있게 하는 일은 시간이 지나가서 점차 익숙해지리라고 생각하지만 가장 가까이 살아왔던 아내의 세계에 대해 문외한으로 살아왔다는 자책감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외부에 나가 강연도 하고, 신문과 잡지에 글도 기고하고, 여러 가지 공적인 역할을 감당하곤 했던 나의 역할은 아내의 보이지 않는 수고 덕분이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가 나를 대신하여 시간을 지불해 준 덕에 나는 다른 일에 더 마음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살림살이라는 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예술이라는 사실도 절감하고 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그러나 해 놓아야 별로 티가 나지도 않는 일, 그것을 매일 반복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산정 위로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스의 고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옛 사람들이 ‘살림’이라는 말과 ‘살이’라는 유사어를 겹쳐 살림살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그런 수고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일의 출발이라는 인식 때문일까?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 중심의 세상으로의 전환을 역설했던 이반 일리히(Ivan Illich, 1926~2002)는 시장의 상품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또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가리켜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라 했다.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다시피하는 전업주부들의 노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무의 열매에는 눈길을 주지만 물과 양분을 찾아 땅 속 어둔 곳으로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뿌리의 수고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그림자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가슴에 깊은 회한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도 있다. 그 그늘을 환한 그림자로 바꿀 수는 없을까? 가정이나 공동체 혹은 한 사회의 성숙함이란 그림자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가슴에 드리운 어둔 그림자를 흰 그림자로 바꾸는 데 있다.


예기치 않게 찾아와 평온한 일상의 흐름을 끊는 낯선 시간은 어쩌면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또 다른 삶의 진실로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