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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의자에 누워

종교칼럼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포로들이 수용소를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탈출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둘째는 자살이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런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수용소이다. 하지만 죽어서라도 수용소를 벗어나는 것이 차역스런 삶을 견디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셋째는 상상력의 힘을 비는 것이다. 제 아무리 엄격한 감시자들도 상상력만은 통제할 수 없었다. 상상을 통해 그는 주로 집에 있는 자기를 떠올리곤 했다. 치과 의자에 기대 앉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쓴다. 이제 잠시 후면 벌어질 일을 가급적이면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지금 독일의 소도시 아이제나허에 있는 바흐의 생가에 와 있다. 뒤뜰이 아름다웠던 그 집.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 건물 2층에는 참 멋진 의자가 있었지. 소라 껍질을 연상시키는 빨간색 의자, 그네처럼 앞뒤로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던, 세상에 그렇게 멋진 의자가 또 있을까. 그 의자에 앉아 듣던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참 장중했지. 장엄한 오르겔 연주를 듣는 순간 왠지 비현실적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그런 의자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 아무리 곤고해도 그 의자에 앉기만 하면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을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 어느새 다가온 선생님의 물음은 바흐 생가에 앉아 있던 나를 다시 치과 의자로 되돌려놓는다. 의자가 뒤로 젖혀지고 얼굴을 가리는 천이 씌워지고 나는 순한 양처럼 선생님의 지시를 따른다. 입을 벌리라면 벌리고 고개를 돌리라면 돌린다. ‘이제부터 나는 비주체적 존재다.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반사경을 사용해서 입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눈길을 의식한다. 그리고 마취제를 맞는다. 조금씩 얼얼해지며 감각을 잃어간다. 그 과정을 의식하다가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그는 슬픔에 빠진 동료들과 제자들을 향해 영혼불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설명했지. 그리고 자신에게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준 건강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독약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했지. 자기 몸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것을 벗들에게 설명하기도 했지. 그 평온함이라니.’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이제는 혀로 마취 부분을 만져보아도 딱딱한 무기물을 만지는 것 같다. 그럴 때가 되면 선생님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가온다. 이윽고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날카로운 도구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라인더 소리, 그리고 탁탁탁 망치질 소리.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타고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산에 오르면 가끔 딱따구리를 만나곤 했지. 산의 정적을 깨는 딱따구리 소리. 어쩌다 나무 줄기에 붙어 주위를 연신 살피며 나무를 쪼는 녀석을 만나면 오지랖 넓게 어지럽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지. 아, 그렇지. 딱따구리는 뇌수가 거의 없어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지. 부리와 두개골이 스프링처럼 탄락있게 연결되어 있어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기에 하루 1만 2천 번 나무를 쪼아도 괜찮다고 했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이 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느닷없이 날마다 환자들의 상한 치아를 들여다보며 그 비좁은 공간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치과의사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민을 느끼는 순간, 피와 물이 뒤섞인 물이 애써 움츠리고 있었던 목구멍을 타고 왈칵 넘어갔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이과수 폭포, 악마의 목구멍을 떠올리려는 순간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어쩜 저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상상력을 발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이윽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마침내 해방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