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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종교칼럼

벨쿠르(Bellecour) 광장은 프랑스 제3의 도시라는 리옹의 중심이었다. 론강 옆에 있는 이 광장은 그동안 유럽에서 만난 광장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광장 한 복판에는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루이 14세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주말이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광장에 나와 있었다. ‘거리 농구’ 시합에 나선 건강하고 건장한 청년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는 일이 참 즐거웠다.

하지만 내가 리옹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이 광장을 찾은 것은 ‘어린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와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옹에서 태어나 9살까지 살았다. 리옹 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집 앞 거리를 생텍쥐페리가로 명명했다. 생텍쥐페리가 8번지가 그가 태어난 곳이다. 그의 집 앞에 작은 동상이 하나 서 있다고 해서 살펴보는 데 아무리 보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대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았는지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물었다. 생텍쥐페리의 동상을 찾는다 했더니 그는 성큼 성큼 앞서가며 따라오라고 했다. 동상이 작아서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면서.

정말 그랬다. 작고 높은 기둥 위에 비행사 모자를 쓴 생텍쥐페리가 걸터앉아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어린왕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안내해 준 이에게 기둥 아래 새겨진 문장의 뜻을 물었다. “내가 죽은 듯이 보일 거야. 하지만 정말로 죽는 건 아닌데…” ‘어린왕자’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은 어린왕자의 말이기도 하지만 저 동상 위의 생텍쥐페리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이면서도 죽을 때까지 비행사로 살다가 비행기와 함께 실종된 생텍쥐페리, 그가 ‘인간의 대지’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1935년에 파리와 사이공 사이의 장거리 항로 개척을 위한 시험 비행 중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추락한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의 대지’에서 자기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거의 사막에 수직으로 쳐박혔는 데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침착한 그와 동료는 치밀한 과학자의 계산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며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 길을 찾아 헤맨다. 이런 식이다. “습도가 낮은 이곳에서 이대로 가면 24시간이 지나면 목숨이 가랑잎처럼 말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동북풍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니 습도는 약간 높아질 것이다. 그래, 동북쪽으로 가자.” 그는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다. 냉철한 그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비행기의 잔해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누군가가 사막에서 일어나는 불꽃을 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최후의 수단도 듣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시시각각 찾아왔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그때 섬광처럼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눈부신 의식의 전환이야말로 구원의 서곡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의미에의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생텍쥐페리와 그는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갈 힘은 누군가에 대해 책임지려는 마음을 통해 유입된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다.

벨쿠르 광장 옆 노천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아이패드에 담아가지고 간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다. 지금 생텍쥐페리는 어쩌면 어린왕자의 별인 소혹성 B612에 가서 바오밥나무 싹을 뽑아내고, 조그만 화산 분화구를 청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해 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지도. 느릿하게 흘러가는 광장의 시간을 즐기다가 울울한 심사를 품은 채 광장에 나앉은 내 조국의 벗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리의 광장은 언제쯤 축제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